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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의 이면

이번주 <씨네21>에는 강한 남성들의 기가 흐른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순전히 영화를 통해서 아시아적인 의협에 매료되었다는데, 그가 만든 <킬 빌>은 마치 젓가락을 들고 현란한 손놀림을 하는 서양인을 보는 듯이 익숙하고도 낯선 느낌을 준다. 더구나 한점의 망설임도 없이 잔혹한 복수의 풍경을 나열해가는 기세는, 이런 유의 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마저도 그 과격한 오락의 장에 슬그머니 눌러앉힐 정도로 강하고 유려하다.

기세로 말하자면 <올드보이>의 박찬욱 감독도 여기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아직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누지 못한 사이임에도 나는 그의 풍모에 관한 매우 뚜렷한 기억 하나를 가지고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초대되었을 때의 일이다. 국내외 기자들이 참석한 공식 기자회견장에서 박찬욱 감독은 오만함 일보 직전의 당당함과 얄미울 정도의 깔끔한 언변을 과시했다. 국제무대에 나선 인사들을 여러 차례 보아왔지만 드문 경험이었다.

신기하게도 사람으로부터 받은 느낌이 영화 속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전작 <복수는 나의 것>에 이어 <올드보이> 역시 위풍당당하다. 타란티노가 그런 것처럼 박찬욱도 대담하기 짝이 없는 상업적 전략을 가지고 있지만 어찌나 오만하고 뻔뻔하게, 영리하고 유려하게 밀어붙이는지, 그 과잉을 탓할 새도 없이 일단 숨부터 훅 들이마시게 된다.

또 한 가지. 박찬욱은 동시대의 젊은 감독 가운데 한국 영화사의 전통과 자신의 작품을 관련지어 공식적으로 언급한 최초의 감독이 아닐까 싶다. 이를 전하는 정한석 기자의 글에 따르면, 최민식의 황량하면서도 기분 좋게 어색한 문어체 대사를 두고 “김기영 감독에 대한 오마주”라며 흡족해하더라는 것이다.

압도할 바에야 이렇게 확실히 압도해오면 그것도 기분 괜찮은 일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생각한다. 영화 안에 조금의 주춤거림도 노출하지 않고 매순간 확실한 인장을 찍어나가기까지, 감독 자신이 감내한 몫은 얼마만한 크기였을까. 신념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된 뒤에 생긴 버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