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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대한 영화의 `거침없는` 목소리,서울독립영화제 2003
이영진 2003-12-05

12월5일부터 서울독립영화제 2003, 한국 독립영화의 새로운 가능성 탐구

얼마 전 대학로에서 열렸던 서울독립영화제 사전 감독 모임. 영화제쪽이 본선에 오른 이들을 초대하는 이 행사에는 50여명의 감독들이 자리해 성황을 이루었다. 이날 가장 바빴던 이는 조영각 집행위원장이었는데, 독립영화계 마당발로 소문난 그도 “감독님 맞으시죠?”라며 손내밀기 바빴다. 집행위원인 구정아씨도 “잘 모르는 감독들이 너무 많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12월5일부터 시작되는 서울독립영화제 2003은 어쩌면 새로운 얼굴들만큼이나 지금까지 맛보지 못한 새로운 영화를 안겨줄지도 모른다.

12월14일까지 10일 동안 서울 대학로 동숭홀과 나다에서 열리는 이번 행사의 슬로건은 ‘거침없는’이다. 낡은 시대, 낡은 영화를 넘어서고자 하는 거침없는 목소리들에 주목하겠다는 이번 영화제의 포부는 다른 어떤 행사보다도 100편의 상영작이 말해줄 것이다. 특히 지난 9월부터 출품된 414편(극영화 286편, 실험영화 35편, 애니메이션 51편, 다큐멘터리 41편 등) 중 예심위원들에 의해 본선에 오른 60편의 독립영화는 선의의 경쟁에 앞서 “현재의 독립영화가 관습과 넋두리를 넘어 어떤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장이기도 하다.

유년풍경(幼年風景)

적지 않은 감독들이 유년의 샘에서 영화를 끌어올린다. 남다정 감독의 단편 <우리 순이는 어디로 갔을까>는 죽음을 알지 못하는 아이의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한다. 항아리에 담긴 어린 동생의 영혼을 뒤쫒는 아이의 발걸음은 두려움과 호기심이 번갈아 교차한다. 권미정 감독의 <큰일났다!>는 무뚝뚝한 아빠에 대한 소녀의 두려움과 애정의 양가적 감정을 목탄으로 풍부하게 표현한 단편애니메이션. 장면 구성에서 과감한 생략이 돋보인다. 노동석 감독의 <나무들이 봤어>는 잃어버린 강아지 초롱이를 찾기 위해 애쓰는 아이를 등장시킨다. 흑백 영상에 비쳐지는 아이의 눈망울은 어쩌면 유년을 벗어나면서 잃어버린 순수의 동공일지도 모를 일. 고주영 감독의 도 비밀이 밝혀진 다음부터 서걱거리는 두 소녀의 관계를 클로즈업한다.

가족붕괴(家族崩壞)

강지이 감독의 <미친 김치>에는 아버지의 학대로 고통받는 여고생이 나온다. 딸은 어떻게든 질곡을 빠져나가고 싶지만 쉽지 않다. 매질을 참기 위해 모성의 환각을 빌리지만 순간일 뿐이다. 하준원 감독의 는 직장을 잃은 한 40대 남자의 몽롱한 하루를 통해 생기를 잃어버린 지 오래인 한 건조한 가정을 까발린다. 빠른 호흡, 매끈한 연결, 숨막히는 반전 등이 돋보이는 작품. 한 중년 여자의 선택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노종림 감독의 <철의 산>도 폐광 직전의 강원도 탄광을 배경으로 가족의 균열을 끌어들인다. 홍두현 감독의 <신도시인>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이 영화는 가족은 붕괴되었나, 라고 묻는 대신 그럼에도 가족은 어떻게 공고한가라고 묻는 듯하다. 뺑소니 사건을 통해 한국사회 중산층 가족의 위선을 비추는 작품. 고부간의 갈등을 그리는 서태수 감독의 <손님>은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생생한 연기가 인상적이다.

파격설정(破格設定)

한줄의 줄거리 요약만으로도 시선을 모으는 작품들이 있다. 오점균 감독의 단편 <생산적 활동>도 그런 영화다. 20대 초반의 가난한 연인들이 섹스할 거처를 찾기 위해 도시 순례에 나서는 내용. 연인들의 사랑이 둘만의 것이 아니라 제3자에게 활력이 되기도 한다는 결말을 놓치지 말 것. 윤준형 감독의 중편 <목두기 비디오>는 방송다큐멘터리의 기법을 빌려 실화와 가상의 경계를 오가며 보는 이에게 공포를 주입한다. 몰래카메라에 우연히 잡힌 한 늙은 남자의 형상이 어쩌면 한을 품은 귀신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으로 나아가면서 흥미진진함을 더하는 것. 김진곤 감독의 <제목없는 이야기>는 김구 선생의 안경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는 요설을 시작으로 근대의 욕망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손쉽게 요리한다. 지민호 감독의 중편 <편대단편>과 김병우 감독의 장편 <ANAMORPHIC> 등도 SF적 설정으로 보는 이를 잡아끈다.

실험천국(實驗天國)

안해룡, 박영임, 김정민우 등 3인이 연출한 중편다큐멘터리 <침묵의 외침>은 정지화면과 분리된 사운드만으로 종군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의 회한과 분노를 강렬하게 표출한다. “다시 태어나면 자유롭게 달리는 말이 되고 잡다”는 할머니의 소망이 환청처럼 계속되는 경험을 맛볼지도.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선재펀드 상을 받은 손광주 감독의 단편실험영화 <제3언어>는 현대 소비사회에서 식민주의를 유포하는 기제인 언어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놀이를 수행한다. 올해 서울여성영화제에서 단편경선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김인숙 감독의 는 뮤직비디오 형식을 빌려와 청년실업이 7.3%에 달하는 고학력 백수시대에 관한 재미난 스케치를 랩으로 들려준다. <달팽이가 애인보다 좋은 7가지 이유>(연출 최수영, 박희석, 김삼력)도 독특한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자유로운 필치로 채색된 연상호 감독의 <지옥>, 박원철 감독의 <자유를 그리다>, 김준기 감독의 <인생>, 정민영 감독의 <길>, 서인경 감독의 <Make a smile> 등 단편애니메이션도 챙겨볼 만하다.

현실응시(現實凝視)

올해 심사를 맡은 예심위원들에 따르면 출품작들 중 “자살, 외국인노동자, 낙태, 분단 등 사회현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한다. 본선에 오른 작품들에도 그런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박인제 감독의 <여기가 끝이다>는 탈북자가 서울에서 겪는 혼란을 그렸는데, 짧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한 엔딩이 호소력을 더한다. 김미진 감독의 <맥도날드 소년>은 낙태를 다루지만 동정이나 연민 대신 경쾌한 판타지를 빌려와 생명을 이야기한다. 독특한 상상력의 집단, 파적의 20번째 영화 <피로 물든 세계지도>는 남편과 장난을 치던 도중 불현듯 떠오른 불길한 상상을 펼치는 영화로 폭력의 원리에 종속되어 있는 현실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최현규 감독의 <빗방울 전주곡>은 극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해고노동자의 근근이 연명하는 삶을 정면에서 보여주는 작품. 원신연 감독의 <빵과 우유>도 직장을 잃은 한 철도 노동자의 이야기인데, 목숨을 끊기 위해 레일 위에 눕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해프닝에 웃음이 깃든다. 김동원 감독의 <송환>, 박정숙 감독의 <소금-철도여성노동자이야기> 등 가려진 현실의 환부를 비추는 데 항상 앞장섰던 다큐멘터리도 놓쳐선 안 될 영화들.

한해의 말미에 열리는 경쟁영화제인 탓에 어떤 영화가 수상할 것인가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국내 초청을 꼼꼼히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해 희생당한 민간인들을 그린 이마리오 감독의 <미친 시간>, <슈가힐> <굿 로맨스> 등으로 잘 알려진 이송희일 감독의 <나랑 자고 싶다고 말해봐>, 지난해 영화제 때 전(前)편이 소개됐던 김홍준 감독의 <나의 한국영화 에피소드4:키노99>,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한 조은령 감독의 미완성 작품을 남편인 김명준 감독이 완성한 <‘하나’를 위하여> 등을 볼 수 있으며 <그집앞> <미소> <선택>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등 저예산영화도 함께 상영된다. 이주노동자들이 스스로 만든 영화를 통해 발언하는 믹스라이스 특별전도 마련되어 있다. 개막작 <어느날 갑자기>를 비롯해 이번 영화제에서는 최근 만들어진 브라질, 아르헨티나의 영화들을 볼 수 있는 해외 초청 섹션을 마련했다. 권해효, 정은임의 사회로 진행되는 개막식에서는 ‘춤추는 언니들’의 공연도 덤으로 볼 수 있다(문의: 02-362-9513(영화제 사무국), 홈페이지 www.siff.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