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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논

학창 시절, “왜 사냐건 웃지요”라는 글귀가 담긴 시를 펜으로 적어서 따로 가지고 다닌 적이 있다. 국어선생님 말씀이나 참고서의 해설이 아니더라도 이 말은 너무 멋졌다. 요즘 누군가가 내게 왜 사냐고 묻는다면 답은 역시 ‘웃지요’다. 이번엔 소녀 시절 특유의 도도한 몽환성 대신, 헷갈리거나 별 생각없으면서도 뭔가 있어 보이지 않으면 안 될 듯하여 어색하게 웃는 웃음일 것이다.

그런데 방만한 자세로 TV를 힐끔거리다가 한 소식 깨치는 순간도 있다. 한국의 쌀 농사가 맞이한 절체절명의 위기와 이에 대응하려는 농부들의 노력을 말하는 다큐멘터리였는데 거기 나온 할머니가 툭 던진 말씀이, 선승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벼락 같았다.

“1년만 묵히면 산 돼버린다. 배고파서가 아니라 보기 싫어서 해야 해.” 정별심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팔순의 여성 농부는, 인건비도 안 나오는 먼 산 다락논을 왜 포기하지 않고 해마다 경작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여기서 삶과 노동의 의미는 미학으로 수직 도약한다.

지난주 <씨네21> 개편호를 낸 뒤 기쁨에 찬 격려에서부터 애정어린 비판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차근차근 수용해나갈 부분도 있고 논쟁적인 원칙에 해당하는 부분도 있다. 이런 것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골똘히 궁리하다가 정별심 할머니의 다락논 생각이 났다.

높은 산 위에 있는 작은 논이라서 다락논일 것이다. 미디어로 치자면 <씨네21>은 작다. 그리고 매주 뚱뚱한 잡지 한권씩을 만들어야 하는 우리 식구들에게 이 노동의 고지는 높다. 때때로 나는 이들의 노동에서 미학을 엿본다.

스탭 리스트에 등장하는 많은 협력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객원디자이너 이혜연씨는 우리의 실험이 의미있는 결과를 낳을지 보장할 수 없었던 컬처잼 섹션 개발 단계에서 자신을 기꺼이 던졌다. “디자인이란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름답게 느껴지도록 보이지 않게 돕는 것”이라며.

새롭게 틀지어진 우리의 다락논을 다시 한번 아름답고 치밀하게 경작하려는 수많은 노력과 함께, 오늘도 <씨네21>의 사무실 창가에 어김없이 밤이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