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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터클

이번주에 본 세편의 신작 영화는 특이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반지의 제왕> <아타나주아> <실미도>가 그 영화들인데 국적과 소재, 스타일 등 모든 것이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비슷한 면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반지의 제왕>은 19세기 음악사에서 달성되었던 바그너적 웅장함이 21세기 초두의 영화사 안에서 체험되는 분수령적인 사건이라고 여겨진다. 신화와 드라마, 음악과 무대디자인이 손발을 맞춘 거인적 풍모의 종합예술작품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거니와 중세에 대한 상상력, 천재적 낭만주의, 그리고 작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뉴질랜드 민족주의 열풍조차 바그너의 음악극이 당대 독일에서 불러일으킨 효과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어쨌거나 이 모든 체험은 하나로 귀결된다. 스펙터클이다.

<반지의 제왕> 이후에 과연 어떤 새로운 스펙터클이 가능할까 의문스러워하며, 그리고 이 자극적인 시각 체험을 지워보겠다는 심산으로 <아타나주아>를 보러 갔을 때, 영화야말로 스펙터클을 개발하는 끝없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했을 뿐이다. 에스키모 감독이 에스키모 언어를 사용하여 에스키모 사회를 배경으로 만든 캐나다영화 <아타나주아>는 얼음과 눈으로만 이루어진 단순한 대지의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면서, 이 단조로운 환경에서 벌어지는 인간사와 부족 신화를 순진한 장르적 기교에 기대어 대비시킴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겨냥한다. 민속지적 특성이야말로 초기 영화사에서 스펙터클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였다. 이 전략은 아직도 유효한 셈이다.

<실미도>는 원한의 스펙터클이라 할 만하다. 영화평론가 이상용씨는 근년에 제작된 한국의 블록버스터들이 원한을 서사의 주요 동력으로 삼고 있으며, 이 원한의 폭발이 스펙터클의 가능성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요지의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실미도> 역시 이 공식에 잘 들어맞는다. 국가 기구가 자행한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에 복수하기 위해 수십년의 세월을 건너 스크린으로 되돌아온 개인들의 원한이 화면 가득 스펙터클을 만들어낸다. 강우석 감독은 이 힘을 요령 좋은 신파 분위기와 뒤섞어가며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비수를 날린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일까, 포화처럼 쏟아지는 이 스펙터클의 향연은. 새로운 기술과 영상 미디어가 젊은 대중의 눈을 사로잡을 때마다 영화는 도태되지 않기 위해 조바심내며 스펙터클을 승부수로 띄울 수밖에 없는 것일까.

오래되고 조용한 멜로영화나 한편 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