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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목과 예의

지난 주에 있었던 <씨네21> 송년회 자리에 참석한 한 감독님이 농담 삼아 전하기를, "언론 때문에 가슴에 대못이 박힌 감독들끼리 모여서 '여섯 개의 눈알'이라는 옴니버스 영화를 만들자"는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여섯 개의 시선>이라는 인권 영화를 빗대어 발언권의 불균형을 야유하는 말일 터이다.

저널이 운용하는 활자는 즉각 칼과 꿀로 변용될 수 있다. 정보를 사전에 접하는 필자들이 독자들에게 판단의 근거를 제공한다는 것이 이 메커니즘의 본질인 까닭이다. 특히 영화는 전달자의 취향과 안목이 큰 폭으로 개입하는 소재다.

그런데 감독들의 비판적 농담과 관련하여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안목과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도리어 어떤 영화가 내 취향이 아니고 보통 수준의 안목에 못 미친다는 판단과 중평이 나올 때, 바로 그때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태도와 방법에 관한 요청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안목과 예의의 대립을 본다. 저널의 공정성이나 균형이란 어차피 신화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쟁점은 표현의 방법과 태도다. 만일 확신에 차서 침착하고 신랄하게 나쁜 점만 꼭꼭 집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안목과 취향'이란 얼마나 섬뜩하고 의심스러운지.

직업적인 기성 저널리스트 외에도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공개적으로 활자를 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비단 특수한 직업 윤리에 그치지 않고 이 시대의 보편 윤리로서 고려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감동을 많이 받는 필자의 유형은, 대상을 통해 읽는 이와 쓰는 이가 생각을 나눌 꺼리를 반드시 찾아 끼워넣는 사람이다. 이런 접근법은 대상이 좋다, 나쁘다, 수준이 높다, 낮다 등의 판단과 무관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거기에 위트까지 곁들여 있으면 바로 팬클럽 가입이다.

내가 받는 입장에 설 때는 속내가 좀 달라진다. 칭찬의 말을 들을 때에는 미소를 감추지 못하면서 좋은 이야기가 더 나오도록 유도한다. 비판을 당하면 나도 마음 속으로 비판을 되돌려 보낸다. 그런 다음 용기를 내서 다시 한번 글을 읽어본다. 마음에 울림이 남으면 눈시울을 붉히며 친구나 동료에게 나의 한심함을 고해한다. 힘주어 찌르려는 듯한 기운만이 느껴지면 내 두뇌의 정보 처리 메모리로 전송해서 건질 것을 대충 건진 뒤 가슴에서는 지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