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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가의 가볍지만 우아한 터치, <알게 될거야>
홍성남(평론가) 2004-02-10

노대가의 가볍지만 우아한 터치, 그게 아니면 적어도 잔 발리바르라는 여배우의 매력이라도 확실하게 알게 해준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전혀 지루하지 않은 154분.

지난 2001년을 두고 누벨바그의 재래를 보여준 한해라고 이야기한 평자들이 꽤 있었다.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프랑수아 트뤼포, 그리고 “영화감독은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현재에도 열심히 실행해가고 있는 클로드 샤브롤을 제외한 누벨바그의 주요 멤버들 세명 모두가 신작들을, 그것도 그해의 가장 주목할 만한 영화들에 속할 만한 작품들을 내놨으니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했다. 이 누벨바그 이후의 새로운 작품들, 즉 장 뤽 고다르의 <사랑의 찬가>와 에릭 로메르의 <영국여인과 공작>, 그리고 자크 리베트의 <알게 될거야> 가운데에서 리베트의 영화가 처음으로 국내 관객과 ‘정식’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이들 영화들은 모두 국내에서 열린 몇몇 영화제를 통해 소개된 바가 있다). 이건 한편으로는 반가우면서도 의아한 일이기도 하다. 고다르에 비해서도, 그리고 로메르에 비해서도, 리베트라는 시네아스트는 우리에게 확실히 미지의 존재에 가까우니까 말이다.

그래서 리베트에 대해 낯설어할 수도 있는 (잠재)관객에게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누드모델>(1991)에 이어 오랜만에 극장 상영되는 리베트의 영화인 <알게 될거야>는 어쩌면 리베트의 생소한 세계로 용이하게 입문하게 할 수 있는 영화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리베트의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 모티브들, 이를테면 현실과 근접해 있는 세계로서의 무대 위의 세계, 비밀과 음모가 은밀하게 이뤄지는 어떤 한정된 공간, 혹은 사랑의 변덕스러움 같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그것들이 경쾌한 리듬 안에 실려 있다. 그런 면에서 <알게 될거야>는 어쩌면 여기에 매혹된 사람들로 하여금 리베트의 세계를 향해 좀더 깊숙이 들어가고픈 욕망을 생기게 해줄 영화가 될 수 있지는 않을까?

영화는 온통 검은색의 화면을 밀쳐낸 빛이 무대 위의 한 여인을 서서히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녀가 영화의 주인공인 카미유(잔 발리바르)이다. 3년 전 파리를 떠나 이탈리아로 가서 연극배우로 성공을 거둔 그녀는 이제 극단과 함께 연극 공연을 하기 위해 오랜만에 파리로 돌아와 있다. 이런 카미유에게 파리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예전의 연인이었던 철학자 피에르(자크 보나페)의 존재를 무심결에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결국 이 두 옛 연인은 만남을 갖게 되고 이어 미묘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한편 카미유의 현재 연인이며 극단의 연출가인 우고(세르지오 카스텔리토)는 18세기 이탈리아의 작가 골도니의 미간행 희곡을 찾는 일에 매달리다가 이 일을 도와주는 젊은 여인 도미니크(엘렌 드 푸제롤레)와 친밀함 혹은 그 이상의 감정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피에르의 현재 연인인 소냐(마리안 바슬레)와 그녀를 쫓아다니는 도미니크의 이복오빠 아르튀르(브뤼노 토데쉬니)의 이야기도 그려진다.

<파리는 우리의 것>(1960)이나 <아무르 푸>(1968) 같은 리베트의 이전 영화들에서 종종 그랬던 것처럼, 루이지 피란델로의 <당신이 내게 원한 대로> 공연을 끌고 들어오는 <알게 될거야>에서도 연극 무대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외딴 세계가 아니라 현실을 비추거나 하면서 현실과 접점에 있는 세계이다. 그래서 영화 속의 연극은 종종 영화 속 인물들의 무대 밖 이야기를 슬그머니 암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혹은 이 영화 속의 극장이 배우와 연출가인 카미유와 우고를 제외한, 즉 연극과 특별한 관련이 없는, 다른 네 인물들이 꼭 한번씩은 들러서 자신들의 감정을 확인해보는 공간이라는 점에서도 현실과 무대 사이의 흐릿한 경계를 알아채기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연스럽게도 무대를 비추며 시작했던 영화는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이 무대 위에 오른 채 문제를 해결하면서 끝난다. <알게 될거야>의 그 인물들은 따지고 보니 현실 상황과 맞물리는 그것의 세팅으로서의 무대에 등장했던 캐릭터들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캐릭터들인가 하면- 피란델로의 유명한 희곡 제목(<작가를 찾는 여섯명의 등장인물>)을 빌리자면- ‘연인을 찾는 여섯명의 등장인물들’이다. 영화 속의 여섯 인물들은 모두가 일종의 커플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 세개의 커플 관계는, 그 구성원들 사이의 복잡하게 꼬인 욕망의 착종 관계 때문에 따로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서로 겹쳐져 있는 카오스의 형국을 보여준다. <알게 될거야>는 욕망으로 말미암은 이 카오스의 세계가 치밀한 타이밍에 맞추어 깔끔하게 정리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려가는 영화다. 당연히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흥미의 상당 부분은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 인물들이 구사하는 밉지 않은 책략들과 그것들에 대응하는 다소 어리숙하기까지 한 반응들에서 비롯한다(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가 어떤 면에서 속임수로서의 ‘연기’를 하는 캐릭터들임을 다시 한번 잊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으로는 리베트라는 노감독이 어쩌면 어리석기도 하고 또 어쩌면 교활할 수도 있는 그 인물들을 여유로이 사랑스런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예컨대 영화 말미의 카미유는 자신의 몸을 이용해 아르튀르가 소냐에게서 훔친 반지를 되찾아오는데 영화는 통념상으로는 정숙하지 않은데다가 교활하기까지 한 이 여자에게서 예전과 달라진 모습을 굳이 발견하려 하지 않는다.

<아무르 푸>의 스토리 개요의 첫 부분에다가 리베트는 피란델로의 구절을 인용해 이렇게 쓴 적이 있었다. “내가 생각해봤더니 우리는 모두 미쳤더라.” 그만큼 리베트의 초기 영화들에는 광기나 편집증, 인간관계의 단절 같은 요소들이 자주 보였었다. 그러나 하워드 혹스나 에른스트 루비치가 다룸직한 별난 커플들의 로맨틱 스토리를 한번 더 꼬아놓고서는 그 험한 도로를 혹스보다는 훨씬 한가롭고 느리게 걸어가는 듯한 <알게 될거야>에는 앞서 이야기한 부정적인 요소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유희할 줄 아는 노감독의 가벼우면서도 우아한 자태가 더 두드러진다. 그래서 <알게 될거야>는 초심자들에게는 리베트의 세계로 좀더 쉽게 들어가는 관문이 될 수도 있다. 2시간30분에 이르는 다소 긴 러닝타임? 이건 4시간은 족히 되는 <누드모델> 같은 리베트의 다른 영화들에 비하면 절대 긴 편이 아니다.

:: 그녀는 우리를 놀라게 한다

잔 발리바르

<알게 될거야>의 한 장면에서 옛 연인 피에르를 찾아갔던 카미유는 그만 예전의 감정이 다시 불타버린 옛 연인에 의해 그만 다락방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연극 공연 시간에도 맞춰가야 하는 그녀는 결국 그 방의 천장을 통과해 지붕 위를 걸어간다. 그때의 카미유의 그 걸음걸이, 서두르는 듯하지만 절대 샌들을 벗지 않은 채로 아슬아슬한 품위를 유지하는 그 걸음걸이는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것 가운데 하나였다. 이때쯤이면 영화를 보는 많은 사람들이 이 여배우의 이름을 다시 한번 마음속에 간직하고 싶어할 것 같다.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매력적인 미소가 돋보이고 가늘고 긴 몸에 유연함과 품위와 확신을 한꺼번에 새겨넣은 그녀의 이름은 잔 발리바르(1968∼)이다.

연극과 무용을 공부한 발리바르는 아르노 데플레생의 <파수병>(1992)으로 스크린에 뛰어들었다. 이후로 그녀는 데플레생(<나의 성생활>(1996)), 올리비에 아사야스(<8월 말 9월 초>(1998)) 같은 저명한 감독들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지금까지 그녀의 매력을 가장 잘 발휘하게 해준 감독은 <알게 될거야>의 리베트라고 봐야 할 것 같다. 발리바르는 <알게 될거야>를 통해 동시대 프랑스 영화계의 가장 뛰어난 여배우 가운데 하나로까지 발돋움하게 되었다. 켄트 존스라는 미국의 저명한 영화평론가는 “그녀가 나를 놀라게 한다”라는 글에서 발리바르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가장 단조로운 대사조차 음악으로 만들어버리는 기분 좋은 목소리, 너무도 우아한 동작에의 감각, 1분 동안은 환희로 번쩍였다가 그 다음엔 분노로 불타는 눈, 항상 주의깊게 말을 만들어내는, 관능적이면서도 독기서린 입. 발리바르는 정말이지 많은 것들을 비축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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