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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무게를 저울질하는 종교적 윤리극, <아들>

아들을 죽인 범인에 대해 복수와 용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아버지의 심리적 밀폐공간, 그 위에서 상연되는 종교적 윤리극

현대 윤리학의 과제는 모든 것을 ‘선택’으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 채택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로 기대값을 구해 ‘죄와 벌’이라는 유구한 심연을 넘어보겠다는 근대적 일환이다. 하지만 선택을 하는 개인 속으로 꿰뚫고 들어가는 미학적 기획은 개념을 구원하려는 이같은 안전망을 갈가리 찢어놓는다. 영화라면, 고대 그리스 비극의 무대가 프레임 안으로 밀려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로제타>로 칸을 석권했던 다르덴 형제의 <아들>은 요컨대 그런 영화다.

재활교육센터에서 목공 일을 가르치는 목수 올리비에. 5년 전 아들이 살해되는 끔찍한 비극을 겪은 뒤, 아내와도 이별하고 홀로 미니멀하기 짝이 없는 일상을 살아간다. 일상만큼이나 건조한 표정과 말들은 그가 사람들과 나누는 관계의 방식이다. 그런 그를 카메라는 시종 편집증적으로 쫓아다니는데 게다가 오직 클로즈업으로 그의 머리만을 겨냥한다. 때문에 그가 뛰기라도 하면 이리저리 솟구치며 흔들리는 불편함을 참아야 하고, 그저 평범한 동작 하나에도 현기증을 느껴야 한다. 아들이 살해됐었다는 기본적인 사실조차 알 길 없는 관객에게 이 급박한 화면은 다소 어리둥절하다.

접사(接寫)와 프로파일만을 오가느라 그의 얼굴은 사각의 프레임에 잘린 채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나마도 벽이나 문처럼 화면 속 닫힌 면들 사이에 끼이기 일쑤다. 그의 전신이 나올 때는 마구 뛰고 있는 동안 아주 잠깐이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엔 다시 그의 얼굴로 집요하게 돌아가는 통에 돌아가는 사정조차 알기 힘든 판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와 사람들의 대화도 죄다 이런 식으로 프레임을 압박하는 면과 선과 벽들 사이 작은 틈에서만 이루어진다. 심지어 카메라는 대화하는 두 인물 모두에게 포커스를 맞추는 데도 지극히 인색하다. 러닝타임의 상당 부분을 이렇게 할애한 다르덴 형제는 한동안 무한에 가까운 인내심을 관객에게 요청한다. 그러나 올리비에의 사연이 드러나면 영화의 미학적 기획이 밝혀진다. 수천년이나 된 윤리적 질문에 대해 선택으로 대답할 이 개인 안으로 꿰뚫고 들어가려는 것이다. 그러나 카메라가 차마 올리비에를 꿰뚫기를 주저하며 지연하는 그 동안, 대신 아주 가까이서 들리는 그의 숨소리를 O.S.T 삼아 듣고 있던 관객이 곧 올리비에와 아주 가까운 심리적 거리로 오게 된다. 그리고 이제 수천년을 이어온 윤리극이 상연될 무대의 막이 오른다. 그것은 극심한 폐소공포증의 공간, 사실은 아들을 잃고 올리비에가 걸어야 했던 마음의 지옥도(地獄道), 바로 그것이다.

아들의 살해범인 열일곱살 소년 프란시스가 목공 일을 배우러 찾아오고 상처입은 아비가 소년의 뒤를 은밀하게 밟는다. 그러나 딱 한번, 소년을 학생으로 받지 않을 수 있었던 처음 그 한번의 기회가 무산된 이후, 이제 그는 걷잡을 수 없는 순간으로 달려가야만 한다. 그것은 올리비에에게 후견인이 되어줄 것을 부탁할 만큼 사정 모르는 소년의 피로 아들의 원한을 씻을 것인가 아니면 용서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윤리적 ‘선택’의 순간이다. 그러나 아득한 자기만의 밀폐공간에 빠진 올리비에에게 선택의 여지란 거의 없어 보인다. 아픈 허리에도 불구하고 무심하게 반복하던 윗몸 일으키기가 실은 올리비에의 허리를 다치게 했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일어날 때쯤, 형과의 동업을 마다하고 그가 굳이 재활센터에 머물렀던 이유를 의심하게 된다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동시에 전처의 뱃속에서 잉태된 아기가 희미한 구원을 그에게 비추기도 한다.

그렇게 결과를 참을 수 없는 초조함으로 기다리게 될 때쯤, 영화는 외딴 제재소가 있는 숲속으로 아들을 살해한 소년과 살해된 아이의 아버지를 이끈다. 그리고 그 노상에서 이들이 나누는 사소한 몸짓과 숨결만으로도 영화는 이미 충분히 위압적이다. 그것은 애초에 선택이 존재할 것 같지도 않은, 혹은 전혀 선택 자체가 무의미할 것만 같은 그의 내면에 충분히 공감한 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택 자체의 무게를 저울질하는 이 윤리극은 한없이 무거워진다.

그러나 선택의 순간에 도달하자, 갑자기 카메라는 이전까지 절대 놓칠 것 같지 않았던 올리비에의 머리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와 가쁜 심리적 밀폐공간을 빠져나온다. 이 느닷없는 이완이 브레송 혹은 베리만을 떠오르게 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 영화는 여전히 윤리적 물음을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한 개인의 심리적인 폐쇄공간을 무대로 한 이 고대 비극은, 인간의 선택 자체만을 긍정하는 종교적 윤리극이 된다. 선택, 다시 또 다른 선택이 있을 것임을 알리는 현대 윤리학의 재확인, 혹은 죽은 ‘아들’이 역시 ‘목수의 아들’이었음을 상기시키는 종교적 승화로서.

:: 감독 다르덴 형제

종교적인 정치극을 만든다

벨기에 출신 감독 다르덴 형제(장-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의 <아들>은 여러가지 면에서 그 전작 <로제타>와 닮은 꼴의 영화다. 음악 등 불필요한 요소를 모두 제거하고 핸드 헬드로 대부분을 완성한 사실적 영상 등의 형식적인 부분에서도 그렇지만, 극히 사회적이거나 윤리적인 소재를 끝까지 밀어붙여 기어코 종교적인 분위기마저 연출한 점에서 특히 그렇다. 주로 후자와 관련해 브레송을 그들의 작업에서 의식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이 적지 않았지만 정작 그들은 이에 대해서 난색을 표하고 있는 편.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경외나 겸손의 표현이라기보다 이들의 전력 탓일 것이다.

68세대 자양분의 세례를 받으며 사춘기를 보낸 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형제는 영상 매체가 노동운동에 끼칠 가능성에 주목, 70년대 이후 이와 관련해 60여편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해왔다. 후기자본주의 노동자가 처한 현실의 구체적 일상을 고통스럽게 부각시킨 <로제타>나 97년의 <약속>도 물론 이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이다. 따라서 지극히 ‘세속적 관심사’로 영화를 만들어왔던 이들이 브레송과 같은 이름을 난감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들>이 전작들과 다른 점은 이 부분에서다. 리버풀에서 발생한 유괴살해사건의 범인이 두 소년이었다는 사실에 착안하긴 했지만 <아들>은 확실히 기존의 사회적 의식을 순화한 감이 있다. 그러나 실직으로 생존을 위협받는 여성에 관한 직접적인 영화를 통해서도 개인의 윤리성을 질문하기를 즐기는 이 형제의 관심사가 극한 상황의 묘사 보다는 그 상황이 개인에게 어떻게 내면화 되는가에 있는 것이고 보면 다소 덜 정치적인 <아들>의 문제의식이 아주 뜻밖인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다큐멘터리를 전문으로 찍어왔다지만 목수들의 구체적인 작업 방식이나 습관까지 놓치지 않는 극영화 <아들>의 사실성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만도 한데, 그 비밀은 <약속>과 <로제타> 등 이 형제의 대표작에 빠지지 않고 얼굴을 비쳐 온 배우 올리비에 구르메가 실제로 목수였다는 사실에 있다. 자신의 이름 그대로 출연하며 목수였던 개인적 경험들을 상당히 녹여낸 <아들>에서의 연기로 그는 칸의 남우주연상을 안았다. 이 부분이 <로제타>와 닮은 또 다른 지점이다. <로제타>를 통해 99년 칸 여우주연상을 받은 에밀리 드켄 역시 실제로 실직 여성이었다는 사실로 화제가 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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