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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여인>

요새 영화계 풍경은 한 극장에서 대여섯개씩 스크린을 잡고 있는 <태극기 휘날리며> 때문에 입이 귀에 걸린 사람과 눈꼬리가 귀에 닿는 사람으로 나뉜다. 자잘하고 사랑스런 영화들은 태풍 <실미도>를 피해 2월이면 극장에 나서볼까 했다가 핵폭풍을 또 만나 한없이 표류하는 중이다. 봄기운이나 들어야 이들에게도 햇살이 들려나. 이런 판국을 보며 블록버스터는 나쁘다고 하자니 우습고 시장 논리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단순하다. 하나마나한 모범답안으로 체면치레하자면, 우리는 지금 영화산업의 제2차 폭발기를 맞아 새로운 문제에 직면한 것이고 문제가 생겼으니 답을 찾아야 하고 답은 목마른 자가 우물 파는 심정으로 달려들고 옆에서 거들어야 한다.

나는 요즘 우물을 파는 대신 틈만 나면 등짝을 바닥에 붙인 채 눈만 가자미처럼 옆으로 돌리고 누워 텔레비전을 보는 중이다. 그랬더니 재미있었다. <대장금>만 잘 만드는 게 아니라 몇몇 드라마, 오락,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 한국 텔레비전의 발전도 장난이 아니었다. 그중에 가장 신기한 것은 MBC 일일드라마 <귀여운 여인>이다. 이야기의 골격은 성격 까다로운 부잣집 사람들과 착하고 심지 굳은 가난한 사람들이 우연히 만나 서로 반했는데 결혼을 하자니 여간 장벽이 많은 게 아니라는, 멜로드라마의 전형이다. 처음엔 좀 심심했다. 그러다 극중 인물들에 대한 감정이입이 시작됐는데 놀랍게도 그 대상이 고약한 부잣집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 정도 부자가 되려면 로또 당첨밖에 길이 없는 형편이니 이상한 일이었다.

주말 한때 드러누우신 부처님 같은 자세로 곰곰 생각을 한 결과 그럴싸한 답이 떠올랐다. 이 드라마는 한국적인 부르주아 멘털리티에 대해 설득력 있는 묘사를 하는 중인 것이다. 언뜻 단조로워 보이던 부잣집 사람들은 다른 계급 출신의 여성들이 접근해오자 자부심과 방어의식, 콤플렉스, 죄책감으로 균열을 일으킨다. 거기에는 한국의 신흥 부르주아지가 형성된 사회역사적 맥락, 아버지/가문/계급의 질서를 교란하는 작은아들, 그 질서의 완벽한 계승자로 보이던 맏아들의 내적 소외, 모성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방어적 히스테리 같은 것들이 오목조목 펼쳐진다. 덕분에 ‘귀엽다’고 전제되긴 해도 캐릭터가 맨송맨송한 내 편인 ‘여인’들보다 저쪽 편 사람들의 분열과 소란이 훨씬 흥미로워진 것이다. 이들이 통째로 파국을 맞는 결론은 아마도 <하녀>(1961)를 만든 김기영 감독이나 부림직한 배짱일 테지만, 이 쩍 벌어진 구멍을 작가가 어떻게 봉합해나가려고 시도할지, 그 자체도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