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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4회 칸 영화제
2001-06-01

오만한 작가주의, 신파에 다시 무릎꿇다

■ 이탈리아 <아들의 방>으로 20여년만의 황금종려, 그러나 아시아는 없었다.

올해 칸영화제 기간 동안 이탈리아는 나쁜 소식 하나와 좋은 소식 하나를 건졌다. 지난 5월13일 실시된 총선에서 루퍼트 머독과

맞먹는 미디어 재벌 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우파가 승리했다는 뉴스가 전해졌을 때 <아들의 방>의 감독 난니 모레티는 흥분했다. 그는

중도파와 좌파의 연합에 반대함으로써 우파 승리의 빌미를 제공한 이탈리아 공산당 당수 베르티노티를 비난하며 “베르티노티는 앞으로 자신을 묘사할

때 ‘정치적’, ‘책임감 있는’, ‘좌파의’라는 세 형용사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어쨌든 우파의 집권으로 시름에 잠긴 국민들에게

지난 5월20일 난니 모레티의 수상소식은 심심한 위로가 될 것이다. 이탈리아영화가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건 실로 20여년 만의 일이다.

역시 <아들의 방>, 예상밖 <피아노 선생님>

놀라운 발견이나 대단한 스캔들이 없었던 제54회 칸영화제는 결국 개막 전부터 관심의 초점이던 난니 모레티의 <아들의

방>에 황금종려상을 안겨주며 지난 5월20일 막을 내렸다. 이탈리아에서 이미 3월 중순 개봉해 5월 초까지 90여만명이 관람했다는 이

영화는 행복한 중산층 가정이 갑작스런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고통받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대체로 정치풍자성격이 짙은 코미디 장르였던 전작들과

달리 이번 영화는 울지 않고 버티기 힘든 드라마다. 프랑스의 일간지 <르몽드>는 <아들의 방>에 대해 ‘난니 모레티가

자신의 어린 시절과 작별하고 부모역할을 감당하기로 한 영화’라고 썼다. 늘 제작, 감독, 주연, 각본, 배급을 혼자 하는 1인 제작시스템에서

작업하는 난니 모레티는 <아들의 방>에서도 아무런 마음의 준비없이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아버지로 등장한다. 정신분석의가

직업인 그는 아들과 조깅하기로 한 날 아침 “급히 만나자”는 환자의 전화를 받는다. 그는 암에 걸렸다는 환자의 고백을 듣고 돌아오는 길에 스쿠버다이빙을

하러 나갔던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영화는 ‘그날 환자의 전화를 받지 않고 아들과 조깅을 했더라면’ 하며 후회하고 번민하는 아버지의

마음 깊은 곳을 여러 차례 들어갔다 나오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부추긴다. 다소 신파적인 설정이지만 화면은 물기가 번지는 순간마다

그래도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나선다.

<아들의 방>이 일찌감치 강력한 황금종려상 후보로 떠오른 것과 달리 심사위원대상, 여우주연상, 남우주연상 등 3개부문을 휩쓴 <피아노

선생님>은 다소 의외다. 독일 뮌헨 태생인 오스트리아 감독 미하엘 하네케의 이번 영화는 상영 직후 주연을 맡은 이자벨 위페르에게 여우주연상이

갈 게 확실하다는 평이 돌았지만 상을 3개씩 받으리라 예상한 이는 거의 없었다. 올해 영화제 상영작을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작품으로 꼽힐 만한

<피아노 선생님>는 일반인이 보기에 비정상적인 성적 행동을 하는 여자가 주인공이다. 비엔나의 음악학교 피아노 선생님인 그녀는 도도하고

이지적이며 우아하지만 성적 흥분을 찾는 방법은 특이하다. 여자는 포르노숍에서 남자의 정액냄새를 맡고 카섹스를 하는 광경을 몰래 쳐다보며 그

자리에서 소변을 본다. 심지어 성기를 면도칼로 그어 피흘리는 데서 오르가슴을 느낀다. 영화는 전반부에서 그녀의 이상한 행동을 관찰한 뒤 그녀를

흠모하던 남학생을 등장시켜 난폭하고도 슬픈 사랑을 보여준다. 심사위원 전원일치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이자벨 위페르는 수상식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영화들은 당신을 두렵게 만든다. 당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는 것처럼.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런 영화들은 당신에게 모든 것을 준다.”

그녀의 말은 <피아노 선생님>의 핵심을 꿰뚫는다. 이 영화는 때로 무섭고 섬뜩하지만 미친 사랑 속에 평범한 연애에서 발견할 수 없는

진실된 감정이 있다는 것을 일깨운다.

미국영화의 선전, 빈손으로 돌아간 거장들

두편의 유럽영화가 황금종려상과 심사위원대상을 나눠가졌지만 올해 칸 경쟁부문에서 미국영화들이 돋보였다. 경쟁부문에 나온 5편 모두 좋은 평가를

얻었으며 그 성과는 조엘 코언과 데이비드 린치의 감독상 공동수상으로 나타났다. 반면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선보인 할 하틀리와 토드 솔론즈의

영화에 대한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할 하틀리의 <세상에 없는 것>(No Such Thing)는 현대판 미녀와 야수 이야기.

동화를 통해 미디어의 위선을 꼬집는 내용이지만 하틀리다운 신선함이 없다는 게 대체적인 평. 토드 솔론즈의 신작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은

10대 소년, 소녀들이 주인공인 코미디로 두 가지 단편을 이어붙인 모양이다. 토드 솔론즈다운 재치와 유머는 있지만 세 번째 영화다운 성숙함을

보여주진 못했다.

심사결과 가운데 평론가들과 기자들의 예상답안과 많이 다른 것은 자크 리베트와 마뇰 드 올리베이라가 빈 손으로 돌아간 사실이다. 리베트의 경쾌하고

활기넘치는 코미디 <알게되리라>는 황금종려상은 못 받더라도 심사위원대상감이라는 호평을 얻은 작품이고, 올리베이라의 <나는 집으로

간다>는 주연을 맡은 미셸 피콜리가 남우주연상을 받으리라 기대됐던 작품이다. 의 평론가 케네스 튜란은 <피아노

선생님>이 3개부문을 독식한 것에 관해 “리브 울만의 개인적 취향이 심사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지 아는 사람이 아니면 예측 못했을

결과”라고 말했다.

영화제 초반 화제작이던 보스니아영화 <주인없는 땅>은 각본상을 받았다.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전쟁을 배경으로 이유없는 분노와 증오를

비판한 이 영화는 마켓시사 뒤 ‘보스니아판 <공동경비구역 JSA>’라는 말이 돌면서 한국 수입업자들의 경쟁이 붙기도 했다. 영화는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전선 한가운데 남게 된 군인 둘이 결국 화해하지 못하고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비극을 담고 있다. 유엔의 평화유지군도 이

지점에선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형편이 되는데 감독은 이런 현실을 코미디의 운율에 실어 대단한 흡입력을 발휘한다. <주인없는 땅>은

보스니아의 다큐멘터리 작가 출신 다니스 타노비츠의 데뷔작으로 황금카메라상 수상도 점쳐졌으나 정작 황금카메라상 수상작은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나왔다. 칸영화제 역사상 최초로 이누이트(북미 에스키모)말로 수상소감을 밝힌 자카리아스 카누크 감독의 영화 <빠른 발 아타나추아트>는

이누이트 미신에 맞서는 두 형제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프랑스, 일본의 부진

수상작들의 국적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지만 올해 칸영화제에서 상대적으로 부진했던 건 확실히 프랑스와 일본영화들이다. 장 뤽 고다르,

자크 리베트, 이마무라 쇼헤이 등 두 나라의 거장들이 체면을 살려주긴 했지만 그들의 뒤를 이을 만한 재능은 눈에 띄지 않았다. 여성감독 카트린

코르시니의 <리허설>은 경쟁부문에 오르기엔 함량미달로 보였고, 프랑스 평단의 지지를 받은 세드릭 칸의 <로베르토 수코>

역시 독창적인 스타일을 보여주는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먼저 상영한 두편의 프랑스영화가 시원찮은 반응을 얻은 탓에 폐막 이틀 전, 프랑스감독

프랑수아 뒤페리옹의 <관료들의 방> 상영 때는 극장을 찾는 기자들의 수가 급감하기도 했다. 개막 전 ‘누벨누벨바그’라는 말까지 들었던

일본영화도 상황은 비슷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디스턴스>는 ‘기억과 실존’이라는 감독 고유의 주제가 이어진 작품이지만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매력이 없었고, 지난해 <유레카>를 통해 기대를 부풀렸던 아오야마 신지의 <사막의 달>은 대충 만든

듯한 인상을 주는 영화였다. <사막의 달>은 현지 데일리 평점이 가장 나빴던 영화 가운데 하나였다.

시선을 집중시켰던 영화 가운데 대중적 호응이 좋지 않았던 작품으로 에르마노 올미의 <무기의 기능>과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타우러스>를

들 수 있다. 두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극장에선 코고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고 자리를 뜨는 관객도 많았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촬영이 너무나

아름답다는 점. <무기의 기능>은 17세기 네덜란드 회화를 연상시키며 <타우러스>는 초록의 향기에 취하게 만든다. 문제는

빼어난 화면을 뒷받침할 캐릭터와 이야기가 부족하다는 점. <무기의 기능>은 16세기 기사 지오반니 메디치가 독일 황제의 군대에 맞서

싸우다 죽기까지 과정을 담고 있으며, <타우러스>는 권력에서 물러난 레닌이 다른 평범한 노인들처럼 병에 시달리며 고통받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올미는 기자회견에서 “저널리즘과 기자들의 질문이 나를 힘들게 만든다. 이런 기자회견의 질문들로 인해 살아 있는 그 무엇이었던

영화는 생난도질을 당하는 셈이다. 당신들은 영화의 배를 가르고 철저하게 분석하는데, 이는 영화를 모독하는 일이다”라고 말해 좌중을 숙연하게

만들기도 했다. 반면 소쿠로프는 히틀러를 그린 전작 <몰로흐>, 레닌을 그린 이번 영화 <타우러스>에 이어 일본의 히로히토

천황을 그린 영화와 괴테를 그린 영화를 3부와 4부로 연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칸의 이유있는 ‘힘’

올해 칸은 지난해 프로그램 책임자였던 질 자콥이 집행위원회 회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티에리 프레모가 프로그래밍을 맡아 치른 첫 행사였다. 현지

언론은 티에리 프레모가 질 자콥의 영향권 아래 있는 인물이라 프로그래밍에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아직까지 티에리 프레모의 프로그래밍에

대한 대단한 반발은 없어보인다. 베를린이나 베니스보다 앞서 거장과 대가의 작품을 모셔오는 능력은 칸의 영화귀족적 자부심을 지켜온 힘이다. 상대적으로

새로운 재능을 발굴하는 데 게으른 측면이 있지만 올해 수상작의 면모를 볼 때 칸의 자식들을 총애함으로써 확보된 권위는 여전히 무시못할 만한

것이다. 무엇보다 전세계에서 몰려든 수많은 기자들과 영화계 관계자들이 아무리 미워도 칸과 공조할 자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내년엔 이곳에서 붉은 카펫을 밟는 한국영화들을 만날 수 있을까?’ 칸에서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잠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깜빡

잠이 든 건 확실하다. 눈앞에서 칸의 해변은 사라지고 차이밍량이 이번에 선보인 영화 <거기 몇시니?>의 한장면이 들어왔다. 처음

프랑스에 여행 온 주인공이 온갖 고난을 겪던 장면이. 어쨌든 불이 켜지고 영화는 끝났다. 알 수 없는 여운만이 가슴에 남는다.

칸=글 남동철 기자 ·사진 손홍주 기자 ·통역 이수원

▶ 제

54회 칸 영화제

▶ 수상

결과

▶ 문

밖의 화제작들

▶ 찬밥신세

된 영국과 독일영화들

▶ 칸

마켓의 한국영화들

황금종려상

<아들의 방> 감독 인터뷰

심사위원대상

<피아노 선생님> 감독 & 배우 인터뷰

▶ 아메리카의

드림 누아르

<거기에

없던 남자> 감독 조엘 코언 & 에단 코언

▶ <멀홀랜드

드라이브> 감독 데이비드 린치

▶ <서약>

감독 숀 펜

▶ 3인의

거장, 세가지 지혜

<나는

집으로 간다> 감독 마뇰 드 올리베이라

▶ <붉은

다리 밑의 따듯한 물> 인터뷰

<알게

되리라> 감독 자크 리베트

▶ 아시아

작가주의 최전선

<거기

몇시니?> 감독 차이밍량

<밀레니엄

맘보> 감독 허우샤오시엔

<간다하르>

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