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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다리 짚은 여인

요즘 탤런트 이승연씨의 곤욕이 크다. 누드 상품을 만들면서 일제 종군위안부 컨셉을 차용하는 바람에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 것이다. “연예인 생명은 끝장”이라는 말이 점잖은 언론에서도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으니 사고를 크게 치긴 친 모양이다. 일부 여성 연예인들이 승부수로 구사하는 누드 동영상은 육체를 엿보게 해주고 돈을 버는 오래된 책략이라는 측면과, 젊은 육체의 화사한 매력을 주저없이 내보이며 가볍게 향유하는 새로운 시대의 덕을 이중으로 보는 아이템이다. 거기에 누군가가 이런 머리를 보탰을 것이다. 대박 나는 영화를 보면 민족의 아픔을 이야기하잖아? 벗은 몸과 민족이라. 위안부가 딱이네. 역사의식이 가미된 엔터테인먼트!

그런데 이 대목이 패착이다.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가 전쟁과 분단 후유증, 부도덕한 군사정권 등 한국 현대사의 깊은 상처들을 건드리며 집단적인 해원을 유도하고 있긴 하나, 매우 영리하게 계산된 눈높이와 감성 코드를 유지하고 있다. 종군위안부 문제는 어떠한 심리적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 건드리기만 해도 으르렁거리는 상처로 남아 있는데, 누드 기획의 주역들이 그만 어수룩한 솜씨로 접근한 것이다.

한국의 식민지 민족주의 체계에서 민족은 흔히 순결한 젊은 여성으로 표상되며, 일본은 여성=민족을 성적으로 능멸한 야수라는 대립항을 이룬다. 아이러니하게도 민족의 정체성을 일본과의 관계에서 역으로 구성하는 셈이다.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정치적으로 끊임없이 재활용되는 위안부 문제는, 그러므로 복잡하게 작동하는 상징 체계이자 이중의 트라우마가 된다.

이승연 누드 파동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그러니까 이 파동의 참된 해법은 이승연씨와 누드 제작자가 위안부 할머니 앞에서 무릎 꿇고 절을 하는 쇼가 아니라, 여성/육체/민족이라는 이 거대하고 탄탄하게 결합되어 있는 관념체계의 실상을 되돌아보는 데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야만 종군위안부가 늙어서도 죽어서도 성역 속에 갇혀 꼼짝 못하는 피해자/애국자가 아니라, 진정 자유롭게 살아 숨쉬는 존재가 되지 않겠는가.

‘홀로코스트 산업’이라는 말이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극우파와 보수적인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에 대한 신성화된 해석을 강요함으로써 막대한 돈벌이 수단 겸 중동정책을 끌어가는 이데올로기로 삼는 현실에서 나온 말이다. 우리는 종군위안부의 존재를 수십년간 외면했다가 이제는 거룩한 순교자의 틀 안에 봉쇄해놓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런 세월 속에서 득을 보아온 사람들은 따로 있다. 나는 그 장단에 춤을 추고 싶지는 않다. 또한 이승연씨가 제 꾀에 제가 무너진 사람이라고 생각은 해도, 역적이라며 돌을 던지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