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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인가요?

“거기 봄인가요? 아, 봄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영화사 봄을 찾는 이성욱 기자의 통화 내용을 들은 정한석 기자가 하하 웃으며 “계절에게 묻는 것 같았어요, 선배”라고 여담을 건넨다. 문득 걷고 싶어진다.

회사 근처에 있는 효창공원은 멀리서 볼 때 아직 가라앉은 갈색이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야트막한 관목들의 머리꼭지에 맑은 초록빛이 올라앉아 있다. 여린 싹은 내게 전혀 다른 감정들을 차례로 불러일으킨다. 처음엔 환하게 반갑다. 그리곤 안쓰럽다. 마침내 무섭다.

오래전, 집 마당에 호박씨를 심었던 적이 있다. 호박죽 끓여먹는다고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도록 다듬다 보니 거기서 나온 씨마저도 의미가 있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몇 센티미터 간격으로 한 구멍에 서너개씩, 요령부득으로 씨앗을 밀어넣고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었다. 마침내 싹이 돋아 올랐다. 어느 씨앗도 실패하지 않고 한 구멍에서 여러 개의 싹들이 하늘을 향해 그 작은 두팔을 힘차게 벌리고 있었다. 너무 많은 호박이 열린 나머지 집이 온통 호박에 눌리면 어쩌나 걱정이 되면서도, 그 어린 것들을 뽑아내 버리기엔 안쓰러워 그대로 두었다. 그해 여름, 집은 호박잎과 꽃으로 온통 덮였다. 넝쿨과 이파리들이 널름널름 덮어올 때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호박은 열리지 않았다.

그 집을 떠나 처음 독립했을 때, 같은 집에 살던 아주머니께서는 부엌에 파를 심어두고 음식을 할 때마다 조금씩 잘라 쓰곤 하셨다. 잘려나간 파의 휑한 구멍을 메우며 어김없이 돋아나는, 끝이 뾰족한 연초록 줄기를 볼 때마다 죽창을 연상했다. 그 시절 많이 불리던 운동가요 가운데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라는 가사가 있었는데, 부엌에서 밤에 마주치는 파는 두눈 시퍼렇게 뜨고 몰래 죽창을 갈고 있는 이미지였고 나는 그때마다 무서움이 사무쳤다. 그 작고 여린 것이.

<씨네21>의 전 편집장이자 영화평론가인 허문영 선생이 지금의 한국영화를 소년성이라는 참으로 역동적인 개념으로 진단한 글을 이번주에 싣는다. 소년성의 막바지라니, 미성숙의 징후를 진단하면서도 힐난이 아니고, 생산자와 관객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파악하면서도 구조적 결정론에 빠지지 않는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여리고 안쓰러운 것들이 마침내 나를 압도했던 예전 경험을 연상했다. 한국영화의 싹들은 잘 자랄 것이다. 1950∼60년대의 선배 영화인들에게 닥쳤던 그런 종류의 불행만 없다면. 이런 이유로 나는 독재정권이나 전쟁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다.

공원을 홀로 걸어도 춥지 않은 걸 보니 봄인 것 같다고, 정한석 기자에게 말해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