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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과 까치

재미난 영화를 두편 보았다. ‘잘 만들었다’가 아니라 ‘재미있다’는 느낌은 다분히 주관적일 터인데, 재미는 취향의 코드와 관련되어 있는 까닭이다.

<라이어>는 성공적인 배우 앙상블 영화로 기억됨직하다. 어떤 영화라고 배우들 사이의 조화가 없을까마는 원작인 연극이 갖고 있는 성격, 그러니까 연출의 치열한 작업을 거쳐 일단 무대에 오른 뒤에는 배우 중심의 호흡과 조율로 전체를 끌어가는 연극성이 <라이어> 안에 잘 살아나 있다. 평소 반복적으로 보여온 이미지를 정통 코미디 감각으로 재활용한 손현주, 공형진씨를 비롯해서 새로운 느낌을 선보인 주진모씨가 이 영화를 감칠맛 나는 시트콤이 되도록 주도한다. 연극성을 살려낸다는 것이 무대 앞에 카메라 뻗쳐놓고 기다린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임을 생각한다면 연기 리듬과 커팅, 정서적 효과음으로서의 음악을 팽팽하게 유지시킨 김경형 감독의 영화적 연출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밝은 미래>에 관해서는 아마도 묵직한 아픔 속에서 피어나는 힘겨운 희망을 우선 말해야겠지만 나는 그보다 이미지를 즐겼다. 압박하는 듯한 색감의 거친 디지털 입자 속에서 문득 나타나는, 사람을 기절시킬 만한 독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몸 전체로 발광하는 환한 빛을 품고 있는 해파리. 그리고 체 게바라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똑같이 갖춰 입고 도쿄 시내를 어슬렁거리는 소년들. 기요시 감독은 디지털-해파리-소년의 이미지만으로 영화 한편을 끝냈다.

어제는 까치 한 마리를 보면서 기요시의 소년들을 생각했다. 공원 산책로에서 만난 그 까치는 무언가에 신이 난 듯 깡총거리는 소년들처럼 스텝을 밟으며 걷고 있었는데, 아닌 게 아니라 뒷모습이 마치 꽁지머리를 길러 늘어뜨리고 반짝거리는 옷으로 멋 부린 소년 같았다. 살금살금 거리를 좁혀가는 나를 힐끔 돌아보더니 ‘쳇’ 하는 듯이 뛰어가 울타리 위에 걸터앉았다. 하는 짓마저 원. 손님을 데려온다는 길조 혹은 화가 장욱진이 영원히 그리워했던 고향의 심상이 아닌, 촐랑거리며 삐딱한 까치의 느낌을 지어내보니 즐거웠다.

4·15 총선 결과를 접하면서 다시 소년과 까치를 생각한다. 객관적으로는 옳은 말이 아닐 수 있지만, 나는 우리의 민주주의 역사를 20여년 남짓으로 기억/경험한다. 군부독재로부터 과도적인 탈출기를 거쳐 범자유주의 진영이 행정부에 이어 의회의 주도권까지 장악한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 지난 20여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좌파의 의회 진출이 동반된 것은 시간이 갈수록 그 의미를 더 실감하게 될 터이다. 길다면 긴 세월이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청년기를 막 맞이하고 있는 참이다. 일부의 기대와 달리 한국 정치는 조용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시끄러워질 테지만 과거 우리를 짓눌렀던 집단적 울화증과는 다른 감정 속에서, 소년처럼 촐랑거리는 한국 정치를 경험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