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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풍의 신파 멜로 속으로 다이빙한 ‘엽기녀’,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박은영 2004-06-02

<클래식>의 신파 멜로 정서와 <엽기적인 그녀>의 캐릭터가 만나면?

상큼 발랄 엽기적인 그녀가 빌딩 옥상에 서 있다. 그 밤에, 그 높은 곳에, 그 처연한 표정은, 왜일까. 옥상 끝에 걸린 두발이 흔들리면서, 그녀는 바람을 타고 한없이 아래로 미끄러져내린다. 평온한 얼굴 위로 흐르는 <노킹 온 헤븐스 도어>. 바로 그때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녀의 이름은 경진이다. 그녀의 이름을 말하면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녀에겐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고층 빌딩에서 추락하고 있는 ‘그녀’를 소개하는 남자친구의 목소리다.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이하 <여친소>)에 대해 우리가 오해한 것이 있다.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곽재용 감독이 의기투합해 만든, 제목부터 명랑한 이 영화는, 코미디가 아니다. <클래식>풍의 신파 멜로 속으로 다이빙한 ‘엽기녀’는 웃거나 웃기기보다는 울거나 울리길 더 자주 한다. <엽기적인 그녀>와 <클래식>에서 과거의 기억으로만 존재했던 연인과의 ‘사별’은 <여친소>에서 그녀가 감당해야 할 현재다. 다시 말해, <여친소>는 이별의 상처를 극복하고, 삶을 긍정하게 되는 한 여인의 성장기, 즉 <엽기적인 그녀>의 전편(속편이 아니라)에 해당하는 영화다.

열혈 경찰 경진(전지현)은 어리숙한 물리 교사 명우(장혁)를 소매치기로 오해하면서, 엉뚱한 첫 만남을 갖는다. 유흥가 청소년 지도 단속을 계기로 다시 만난 그들은 장난 삼아 나눠 찬 수갑 열쇠를 잃어버리면서, 파출소 숙직실에서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 연인으로 발전한다. 과격하고 무모한 여자친구 걱정에 사건 현장을 찾은 명우는 사고로 목숨을 잃고, 연인의 죽음을 자책하던 경진은 죽음을 재촉하듯 점점 위험한 현장 속으로 돌진해 들어간다.

경진이 경찰이라는 설정은 다양한 사건 사고와 액션의 구사를 가능하게 한다. 그녀는 여전히 엽기적일 뿐 아니라 자기 일에도 열심이다.

연인의 수호천사가 된 명우의 영혼은 ‘바람’이다. 명우는 엽기녀의 파트너 견우처럼 유약하고 순종적인가 하면, 연인의 보호자를 자처할 만큼 자상하고 믿음직한 남자친구. 사건 현장에 끼어들었다가 도리어 여자친구의 구조를 기다리며 눈물을 글썽이는 일도 있지만, 쌍둥이 언니를 먼저 떠나보낸 여자친구의 상처를 부드럽게 보듬을 줄도 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불길한 말을 자주 한다. “내가 없을 때 바람이 불면 그게 나인 줄 알아. 난 죽으면 다시 바람이 될 거야”라든가, “내가 죽으면 너도 따라 죽을 거야?”라든가. 그러다 정말로 죽고, 바람이 되어서, 여자친구의 곁에 남는다(한때 이 영화는 <바람개비>라는 가제로 불렸고, 영문 제목은 <문스트럭>을 응용한 <윈드스트럭>(windstruck)이다).

무한정 연인을 배려하는, 촌스럽지만 순수하고 ‘클래식’한 사랑. 그것은 아마도 곽재용 감독의 영원한 테마일 것이다. 피천득의 수필집 <인연>을 선물하고, 종이 비행기에 사랑을 띄워 날리는 그들의 사랑법은 이 시대의 것도, 현실의 것도 아니다. 경진이 명우에게 들려준 ‘새끼손가락’에 얽힌 전설,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공주와 왕자의 약속, 그 사랑의 ‘전설’은 예언처럼 그들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 경진과 명우의 러브스토리는 그러니까, ‘전설’의 경지다. 하지만 사랑(전반전), 이별(후반전), 극복(연장전)으로 구성된 이 사랑의 전설은 눈물과 한숨, 죽음에의 매혹을 너무 ‘오래’ 그리고 너무 ‘진하게’ 드러내서, 손수건을 준비한 관객마저 지치게 할 위험이 있어 보인다.

아시아 스타로 성장한 전지현을 전면에 드러낸 영화인 만큼 <여친소>는 전지현의 매력 종합선물이랄 만하다. 교복 맵시가 좋았던 전지현에게는 경찰 제복도 참 잘 어울린다. 바람 속에서, 비 속에서, 햇살 속에서,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말갛게 웃는 그녀를, 카메라는 홀린 듯이 비춘다. 엽기적일 뿐 아니라 자기 일에 열심이기도 하고, 비탄과 체념의 정서를 표현하기도 하는 그녀는 ‘엽기녀’시절 보다 한결 깊어진 듯 보인다. 문제는 ‘스타’ 전지현의 이미지가 작품과 캐릭터에 몰입을 방해한다는 것. 의류 광고에서처럼 <울리불리>가 흐르는 가운데 트레이닝복을 입고 달릴 때, 영화 제목을 카피로 내세운 CF에서처럼 “꺾어 먹는” 요구르트를 떠먹을 때, 그가 광고하던 샴푸의 로고가 새겨진 애드벌룬이 어른거릴 때, 그 주도면밀한 스타 마케팅에 감탄하게 되지만, 영화에 정서적으로 몰입하기는 힘들어진다.

배려 깊고 순수한 사랑과의 이별, 신파 멜로에 더 가까운 <여친소>는 웃거나 웃기기보다는 울거나 울리길 더 자주한다.

“기회가 되면 액션영화를 만들고 싶다”던 곽재용 감독은 <여친소>를 바로 그 ‘기회’로 삼았다. 여주인공을 경찰로 설정했기 때문에 다양한 사건 사고와 액션 구사가 가능했던 것이다. 러시아 마피아 밀매 조직과의 총격전을 필두로, 인질범 추격신, 탈주범 총격신, 차량 폭파신까지 연출했고, 수중 촬영과 항공 촬영도 선보였다. 감성 멜로의 틀과 정서를 그대로 가져가면서도, 액션 스펙터클의 비중을 늘려, 시각적 쾌감이 있는 멜로드라마를 선보이겠다는 야심인 것이다.

엽기녀 혹은 전지현 효과에서 파생된 영화 <여친소>는 전지현과 곽재용 감독에게는 물론, 본격 아시아 프로젝트로서도 중요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와호장룡>과 <영웅>의 프로듀서 빌 콩이 제작비 전액을 투자하고, 해외 배급을 책임지기로 결정해 화제가 됐던 <여친소>는 6월3일 한국과 홍콩에서 동시 개봉하고, 중국에서도 6월8일에 개봉한다. 월드 프리미어는 5월28일 투자 및 제작사 애드코가 있는 홍콩에서 열렸다.

:: <여친소>를 보면 떠오르는 영화들

<엽기적인 그녀>에서 <칼리토>까지

<여친소>를 보면 떠오르는 영화들은 물론, <엽기적인 그녀>와 <클래식> 등 곽재용 감독의 전작들이다. 서정적이고 최루적인 멜로드라마로 이제 하나의 ‘브랜드’가 된 곽재용 감독이 즐겨 쓰는 표현들은 <여친소>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여경과 명우의 첫 데이트에 쏟아진 소낙비(사랑의 시작이다), 수업 시간에 이뤄지는 구애의 이벤트(이번엔 장미꽃이 아니라 도시락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여경의 슬픔과 죄의식, 이야기 속의 이야기(‘엽기녀’의 영화 이야기와 <클래식>의 엄마 이야기에 이어), 1인2역(이번엔 모녀가 아니라 쌍둥이다), 창가에 날아드는 흰 비둘기(다른 차원, 다른 이야기로의 초대) 등이 그것이다. 또한 소문난 영화광인 감독의 이력을 되짚지 않더라도, 그가 참고했음직한 영화들을 몇편 떠올릴 수 있다. 우선 연인을 떠나보내고 홀로 남은 여인이라는 설정에는 <사랑과 영혼>과 <러브레터>가 겹쳐 떠오른다. 특히 초기 시나리오에 존재했던 캐릭터 앙드레 김은 <사랑과 영혼>에서 생사를 초월한 연인의 만남을 주선했던 우피 골드버그의 캐릭터와 닮아 있다(이 캐릭터에 얽힌 에피소드는 촬영되지 않았다). 또한 책을 매개로 과거의 비밀을 발견하게 되는 에필로그는 <러브레터>를 연상시킨다. 영화 속에서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총격 액션신에서는 <언터처블>과 <칼리토>, 그리고 오우삼의 영화들에 대한 오마주를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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