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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과 연기에서 의외의 행보 보여주는 배우 정준호
사진 오계옥박혜명 2004-06-17

정준호를 두고 이제 무거움이나 진지함의 형용사를 떠올릴 사람은 없다. <두사부일체>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줘> <가문의 영광> <동해물과 백두산이> 등의 필모그래피를 이어오면서, 소심하고 순진한 옆집 남자의 캐릭터를 일관되게 코미디영화 속에서 보여온 정준호. 올해 첫 작품으로 최근 개봉을 앞둔 <나두야 간다>도 조폭 두목의 자서전을 대필하게 된 삼류 소설가의 좌충우돌을 다루면서 코미디의 함량을 높인 영화다. 당연히, 같은 장르를 고집하는 이유와 속생각들이 궁금해졌다.

또 하나. 그는 지난해 제작사를 꾸렸다. <동해물과 백두산이>는 그의 영화사 주머니필름이 제작한 첫 영화다. 대표 직함은 달고 있지 않지만 최종 결재권을 행사하고 있고, 최근엔 호텔사업도 시작했다고 한다. 사업에 남다른 욕심을 보이는 그의 또 다른 행보는, 뭐든 다 내줄 것만 같은 사람 좋은 미소에서 잘 연상되지 않는다.

필모그래피만으로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각을 품고 사는지, 다른 어떤 배우들보다도 짐작이 되지 않는 정준호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인터뷰 뒤에 약속이 있다며 예의 점잖은 정장 차림으로 등장한 그는, 최근 출연한 오락프로그램 이야기를 꺼내며 “그렇게 착하게 생긴 여학생들 중에 친구의 연인을 뺏은 사람이 13명이나 됐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여러 번 놀라움을 표했다. 그렇지만 그보다 놀라운 건, 영화 속 캐릭터와 꼭 닮은 소박한 인상 속에 감춰져 있던 그의 당당한 야심이었다.

본인도 당연히 예상했을 법한 질문일 텐데, 코미디영화를 계속 해오고 있다. 본인이 코미디 연기를 했느냐 상황이 웃겨준 것이냐를 떠나서, 왜 계속 같은 장르를 선택하는지 궁금하다. 처음엔 신선했다. 워낙 단정하고 바른 이미지라 그런 게 깨지는 데서 오는 재미도 있었고. 그러나 그것이 큰 변화없이 이어지고 있다.

대본을 볼 땐 장르를 생각하지 않는다. 배우는 여러 대본들을 읽다가 제일 매력있게 다가오는 걸 선택하게 된다. 나도 어떤 영화가 드라마쪽이라고 생각해서 선택을 하지만, 마케팅을 해야 되는 제작자나 홍보쪽 입장에서는 흥행이 될 만한 방향을 생각한다. 그러다보면 대본이 바뀌는 수도 있고, 한쪽 면만 부각되기도 하는 거다. 어쨌든 나는 아직까지 시나리오에서 받은 느낌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데, 영화는 시나리오보다 더 중요한 게 감독이라는 걸 요즘 많이 느낀다. 감독의 예술이고 감독에 의한 시스템에서 만들어지는 거다라는 점.

-그런 식으로 영화가 달라지면 본인이 의견을 어필하기도 하나.

=한다. <나두야 간다>도 나는 누아르라고 생각하고 선택했다. 순수했던 소설 작가가 돈을 벌기 위해 자서전 대필을 하게 되면서 전혀 다른 집단에 들어가 자기도 모르게 깡패가 돼 결국은 어느 순간 제2인자한테 칼을 맞는 과정들이 그랬다. 그래서 난 주인공이 죽는 걸로 결말을 맺었으면 했다. 결국 내 인생의 선택은 옳지 않았다라는, 가족한테는 적절한 아픔을 주고 인생을 되새겨보게 하는 영화로 했으면 하는 바람이었고 그걸 요구했지만 투자자나 배급사 입장에서는 흥행이 되는 쪽으로 가려면 재밌는 게 더 좋겠다고 얘기를 해왔다. 그럴 때 내 의견을 더 피력하려면 할 수도 있겠지만 내 성격이 좀 우유부단하다. 그런 일로 사람들하고 트러블이 생겨서 작업에 차질이 빚어지면 나도 불편하니까 거국적인 측면에서 (웃음) 그렇게 결말이 났다.

-인간관계가 일의 전부는 아니다.

=물론 그럴 때마다 앞으론 처음부터 상대방의 확고한 의지를 들어놓고 시작해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영화 만들다가 사람 잃고…. 인기와 배우의 생명은 하루아침에도 물거품이 될 수 있다. 절대로 지지 않을 것 같은 천하의 별이라고 해도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 취향이 변하면 떴다가도 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남는 게 뭐냐는 거다. 인기를 잃었는데 사람까지 잃으면 안 되잖나. 옛날에 포장마차에서 같이 소주 마시면서 만날, 형, 나 도와줘야 돼, 이랬던 사람들인데, 나는 먹고살 만큼 잘 풀렸다고 그 사람들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거다. 그나마 내가 도움 줄 수 있을 때 나한테 부탁을 해라, 그래서 이렇게 됐다, 핑계라면. (웃음) 핑계라면 이렇게 됐는데, 그 대신 배우로서 나한테 가장 부담되고 무서운 건, 상품을 선전할 때 덮어놓고 무조건 좋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럴수록 관객과 나와의 신뢰는 점점 무너져가고 내 살 깎아먹기밖에 될 수 없다. 그래서 ‘이 작품을 하면서 나는 솔직하게 아쉬움이 정말 많다. 점수로 따지면 20점밖에 안 된다’라고 얘기하는 게, 제작자나 투자자 입장에서는 안 좋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배우 입장에서는 유일한 살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지금까지의 필모그래피에 대해서는 그렇다 하더라도, 현재 눈앞에 둔 영화들이 <가문의 영광2> <투사부일체>(<두사부일체> 속편) <역전의 명수> 등 모두 코미디다. 전작이나 제작사에 얽힌 인간관계가 있었겠지만 <가문의 영광2> 같은 건 본인이 더 적극적이라고 들었다.

=소문이 좀 잘못됐다. <가문의 영광2>든 <투사부일체>든, 영화를 너무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 같아서 안 한다고 통보를 했다. 인맥하고는 상관이 없다. 만약 (출연)해서 전편보다 더 잘됐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배우로서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없다고 생각한다. 저 사람에게 저런 면도 있구나, 하는 것도 가끔이지, 여기 써먹고 저기 써먹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굳이 제작을 해야겠다고 말한다면 나도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역전의 명수>는 코미디영화가 아니다. 1분20초 차이로 태어난 쌍둥이 이야기인데, 하나는 아주 거칠고 남자답고 순수하게 자란 친구(명수)이고, 다른 하나는 성공을 위해서 모든 걸 버리는 아주 악랄하고 못된 친구(현수)다. 그리고 어머니는 현수의 성공을 위해 명수를 희생시키지만, 결국 남는 것은 상처뿐인, 휴먼드라마에 가깝다. 1인2역을 한다는 데 매력을 느꼈고, 정말 연기에 몰입해서, 두 인물을 아주 극단적이고 대조적으로 보여줘서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영화를 해보고 싶어 결정했다.

-지난해에 주머니필름이라는 제작사를 만들었다.

=나는 비즈니스 마인드가 아주 강한 사람이다. 작품을 선택할 때도 매니저를 안 보내고 내가 직접 만나는 편이다. 거절하더라도 직접 찾아가서 거절하고. 배우로서의 인생만 산다면 그럴 필요가 없겠지만, 난 배우의 인생을 떠나서 개인적인 야망을 갖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하는 거다. 그 야망에는 배우로서의 성공도 있고 사업가로서의 성공도 있다. 그래서 호텔사업도 그렇지만, 영화사 같은 경우는 내가 영화배우로서 활동하는 동안 좋은 작품을 여건만 되면 시기와 상관없이 만들 수 있고 또 내가 출연할 수도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어서 차려도 괜찮겠다는 생각으로 만든 거다. 내가 배우로서 평생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는 없다. 어느 순간 2선으로 물러나고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줄 텐데, 그때를 대비해서 만들어놓은 측면도 있다. 그래서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차렸다.

-주위에서 어떤 이유를 들어 반대했나.

=선배님들이 시행착오를 겪어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으니까 반대를 했다. 영화사를 차리든 다른 비즈니스를 하든, 배우가 대표이사라는 직함을 갖고 있게 되면 법적으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공인이기 때문에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고 입방아에 오를 소지가 많다. 공인이기 때문에 타깃이 자기한테 돌아오는 거다. 만약 이쪽에서 돈을 요구하면 상대방은, 일반 사람들이 한 일이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일도 정준호란 사람이 사기를 쳤다, 횡령을 했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고 언론에서도 어? 정준호 고소당했다, 이렇게 나온단 말이다, 시나리오를 쓰자면. 그러면 고소한 사람 입장에서는 아, 이게 무기구나. 그렇게 되는 거다. 결국 그걸 막기 위해 돈으로 입을 막고…. 그랬기 때문에 주위에서는 배우가 연기만 하면 됐지, 왜 사업을 해서 골치를 앓느냐며 말렸다.

-직접 해보니까 어떤가.

=배우가 제작자를 겸한다는 건 단점보다 장점이 더 많더라. 프리프로덕션 과정에서 쓸데없이 들어가는 제작비 문제, 배우 캐스팅에 걸리는 시간문제, 홍보·마케팅에서 배우가 임하는 자세문제 등등. 첫 작품(<동해물과 백두산이>)으로 크게 손해는 안 봤고, 느낀 것도 많다. 영화제작은 전문적인 시스템이 갖춰져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것. 좋은 영화사가 되려면 각자 파트에 맞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경력이 많은 사람, 의욕이 많아서 발로 뛰어줄 사람. 여러 가지 조화가 잘 이루어져야 좋은 영화사의 시스템을 갖추게 된다는 걸 한 작품을 통해 많이 배웠다. 영화를 많이 제작하는 할리우드나 유럽에서는 배우가 제작사를 가진 경우가 많다. 좋은 작품을 언제든지 만들어서 출연할 수 있다는 시스템을 갖춰놓은 것뿐이지, 내 입장이 이전과 크게 달라진 건 없다.

-호텔사업은 언제 시작했나.

=3월1일부로 인수를 해서, 1대 주주로 있다. 사업이면서 일종의 재테크이기도 하다.

-앞날을 내다보고 차근차근 뭔가 해나가는 것이, 미래에 대해 책임감을 가진 계획적인 사람인 듯하다.

=인터뷰하면서 할 얘기는 아닌데, 써도 좋고 안 써도 좋지만, 나는 되게 잡초처럼 살아왔다. (한참 침묵) 깡패두목 김태촌 같은,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격동의 세월을 거쳐오면서(웃음) 거창하게 얘기하자면 때론 한 여자를 사랑해서 집까지 나가본 적이 있고, 때론 약한 자를 괴롭히는 놈을 때려서 벌도 좀 받아봤고. 내 자랑을 좀 하자면, 학교 다니면서 러브레터를 하루에 몇십통씩 받았다. 내가 등교하는 시간에는 여학생들이 창문을 다 채우고 막 소리지르고 그랬으니까. 고1 때 대학교 4학년 누나하고 연애도 해봤다. 그 누나가 나 아니면 죽는다고 할 정도로 나는 매력적인 학생이었다. 그땐 거칠 게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바닷속의 진주가 갖고 싶다면 산소통 안 메고 들어갈 정도로 난 강했거든. 친구들 몫까지 뒤집어쓰고 벌도 받을 만큼. 배우생활 하면서 많이 약해진 거다. 난 온실 속에서 보호받고 자란 사람이 아니라, 모진 세파에 휩쓸려 여기까지 온 사람이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내가 대단한 놈이라고 생각한다. 스크린 속에서 정준호라는 사람이 보여준 거는 내가 갖고 있는 것에 10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이제 무섭게, 몰라, 내가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재밌는 부분들이 있을 거다.

-복안이라도 있는 것 같다.

=그런 것일 수 있다. 그러니까 내가 더더욱 내 자신한테 충실한 건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겉모습이 부담을 주기 때문에 부담없어 보이는 편안한 연기자로 가는 메이킹 중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 다음이 되면, ‘저것 봐, 저 사람 심각하면 재미가 없다니까’ 이런 게 아니라 심각하면서도 ‘저 사람은 저기서 뭔가 하나 해줄 거야’라는 기대감을 주게 될 거다. 말하자면 배우로서 내 상품을 관객에게 애프터서비스도 해주고, 수요자들의 불만 사항도 접수하고 그래서, 이제는 견고한 상품으로 만들어서 하자가 없게(웃음) 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거다. 관객이 목말라할 때 바꿔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람들은 노래를 듣고 싶어하는데 본인이 안 하고 있다. 노래도 웬만큼 하고, 독특한 색깔도 있는데. 한번은 불러야 될 텐데. 술자리 끝나기 전에. (웃음) 타이밍이 좋을 때 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사람들이 화장실 갔을 때 말고, 다 모여 있을 때 불러보고 싶은 마음은 있다. 그게 어느 때가 될지는 모르겠는데, 파격적인 변신을 할 때가 오겠지.

-국문과를 전공해서 그런지 몰라도 비유가 재미있다.

=졸업은 아니고 중퇴했는데, 음…, 내가 사실은, 책을 좀 많이 읽는다. 책 속에 들어가면 모든 걸 다 잊을 수 있다. 집에 있을 때에도 서재에 있을 때가 가장 좋고 편하다. 책들마다 다 사연이 있다. 예를 들어 아, 저 책은 샌프란시스코 갈 때 누구랑 기내 안에 있으면서 읽었던 책이야. 겉표지를 펼치면 그런 게 쓰여 있다. 내가 다 써놓는다. 몇년, 몇월, 며칠, 날씨 맑음. 오늘은 누구랑 어디를 가는 길에… 뭐 이런 식으로 그 순간 느꼈던 감정들을 간단하게 써놓는다. 다이어리에다도 조그맣게 써놓고. 달력에도 뭐가 막 써 있다. 그때 만났던 사람, 종로3가 어디 술집에서. 간단간단하게 써놨지만 그런 것들을 죽 넘겨보면서 과거를 돌이켜보곤 한다. 이사갈 때도, 다른 건 다 이삿짐센터에 맡겨도 내 책은 내가 다 박스로 싸서 끈으로 묶고 내 차에 싣고 간다. 그리고 그것만은 직접 정리한다. 박스 겉에다가 개인소장품, 보물1호, 이렇게 써가지고. (웃음)

-몇권 정도 되나.

=창고까지 다 합치면 1천권 정도 될 것 같은데.

-변신하겠다는 의지와 욕구를 밝혔지만, 정말 본인이 하고 싶은 작품을 만나려면 앞으로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예스/노를 분명히 하는 게 신뢰감을 줄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일 것 같다.

=내가 사람들한테 주는 것만 좋아하니까 어머님이 어렸을 때 늘 그러셨다. 넌 왜 그렇게 실속이 없냐. 지금도 하루에 몇번씩 그런 생각을 한다. 나도 실속을 차리자. 이제는 싫은 소리도 해야 할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을 조금 서운하게 하더라도, 배우 정준호가 하고 싶은 영화, 정준호가 관객에게 특별히 보여주고 싶은 역할, 그런 걸 한번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고, 이제 지면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통고를 해야지. 앞으로는 개인적인 부탁이나 이런 거 힘듭니다. (웃음) 내 인생의 역작이 될 수 있는 영화를 해야 하지 않나 싶다. 정말 지독한 감독하고, 아주 지독한 감독하고, 내가 다시는 영화하기 싫다 할 정도로, 그런 정도로 나를 끌어낼 수 있는 감독하고라면, 나는 바치겠다. 그런 거에 나도 굶주려 있고, 또 그 굶주림을 영화로 표현해낼 수 있는 나이가 돼가니까.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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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협찬 최범석, SSAM / 스타일리스트 안미경 / 헤어 및 메이크업 임정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