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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영화

“샤트야지트 레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몹시 울적했다. 그런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 신이 그의 자리를 대신할 적임자를 찾아냈다는 것을 알았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영문 포스터에 인용된 구로사와 아키라의 말이다. 나는 벽에 붙여둔 포스터에서 꼬마의 눈길과 마주칠 때마다 이 영화를 처음 본 날 몸이 느끼던 진동을 회상한다.

내게 있어 프랑스 누벨바그의 첫 번째 이미지는 어린아이의 모습이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때문이다. 행복하지도 않고 착하지도 않은 어린아이가 바다를 향해 내달리다가 물에 가로막혀 뒤돌아서는 그 얼어붙은 마지막 프레임이 내 가슴을 400번쯤 구타하지 않았을까.

만화영화 <로보트 태권브이>에서 조그만 깡통 로봇이 가슴에 달린 양철 뚜껑을 열고 고춧가루를 발사하던 그 시절 이래로, 나는 어린이 영화에 민감하다. 그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다. 오지 않는 무언가를 기다리며 먼 곳을 바라보거나, 마당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어린아이가 정지 프레임 속에 담긴 채 내 기억 속에서 아직도 살고 있는 것이다. 안에 사는 아이는 바깥에서 온 아이의 방문을 받을 때마다 몸을 떨며 함께 슬퍼하거나 기뻐한다.

그래서 나는 어린이 영화나 성장영화를 볼 때, 저 영화 속 어린이 혹은 청소년이 정말 감독이나 작가의 가슴속에 살고 있다가 튀어나온 존재인지 아니면 말짱하고 건조하게 어른이 된 사람의 관념적 투사물인지를 쉽게 알아차리는 편이다. 후자의 경우는 어른의 사랑 이야기나 죄의식 따위를 깜찍하게 복사하거나, 반대로 어른적이라고 여겨지는 나쁜 것들을 몽땅 걷어내버린 천사로 나타난다. 나는 이야기를 조르는 어린 조카에게 별 생각없이 <백설공주>를 들려주다가, 이 동화마저도 어린이 세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어린이를 훈육하려는 어른의 협박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고 기겁을 했다. 품에 안겨 있던 작은 여자아이 역시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움츠렸다.

실제의 어린이 세계는 어른의 세계와 독립적이다. 그러면서도 어른의 계몽, 억압, 위선과 끊임없이 길항하며 그 틈새로 어린이 특유의 원초적인 사랑과 전능한 상상력이 힘겹게 빛을 발한다. 그 상상력은 어둠과 공포도 물론 포함한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어린이 영화와 인접해 있는 성장영화인데 이 영화를 능가하는 어린이 영화 혹은 성장영화는 한국에서 아직 나오지 않았다.

성장영화 색깔을 제법 띠고 있는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시사회에 앉아서 이런 생각을 했다. 어린이 영화를 만들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