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영화인
그리스의 거장 테오 앙겔로풀로스와의 대화
홍성남(평론가) 2004-11-03

“감독은 항상 깨어있는 영혼”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1984년작 <시테라 섬으로의 여행>은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일종의 분기점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영화다. 스타일과 주제에 있어서 자신만의 강박관념을 벗어나지 못하는 탓에 항상 자신의 우주 안에서 생성된 듯한 영화들을 만들어온 그의 영화적 궤적도 바로 그 영화를 전후로 미묘하면서도 중요한 변화를 보여주기에 그렇다. 즉 <시테라 섬으로의 여행>을 사이에 두고 앙겔로풀로스의 영화는 집단에 초점을 맞추는 정치적 모더니즘의 영화로부터 좀더 냉소적인 태도로 개인의 실존적인 위기를 들여다보는 영화로 이행한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앙겔로풀로스에 대한 글들에서 심심찮게 나오는 일종의 정설 같은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그의 영화를 보거나 이해하기를 바라는 이들을 위한 편의적 단순화처럼 보일 수도 있는 그런 설명의 원천이 앙겔로풀로스 자신에게 있다는 점이다.

특히 관객의 손쉬운 이해를 용납하지 않는 영화를 만드는 어떤 영화감독들은 자기 영화에 대한 설명을 결단코 거부하곤 한다. 앙겔로풀로스의 경우에는 그와는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는 시네아스트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그가 관객의 역할을 부정한다는 말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그 어떤 영화비평가보다 앞서서 자신의 영화에 대해 조리있고 명민하게 그리고 기꺼이 주석을 달 수 있는 해설가이며(예컨대, <시테라 섬으로의 여행> <비키퍼> <안개 속의 풍경>으로 이어지는 3부작이 각각 역사, 사랑, 신의 침묵에 대한 영화라고 명명한 것도 앙겔로풀로스 자신이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아트시네마’의 영역 안에서 활동하는 이의 의무 비슷한 어떤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는 ‘대화’에 굉장히 성실히 임하는 영화감독이다. 그런 그가 멀리 한국에 와서도 변함없이 동일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마치 자기 영화의 한숏 한숏처럼 길게 대답하는 바람에 많은 질문을 던지지 못한 아쉬움은 자기의 영화세계에 대한 이야기에 깊이 밴 성실함으로 어느 정도 보충이 될 듯하다.

먼저 어떻게 영화와 ‘만남’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부터 이야기해달라.

아직 영화에 대해서 잘 몰랐던 시절에 한편의 영화를 보고서 큰 감동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보면 나의 영화 체험은 그보다 더 시기를 거슬러올라간다. 어린 시절의 나는 당시의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야외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을 보러 갔었다. 야외의 한쪽 면에 스크린을 설치해놓고 그 주변은 벽으로 에워싼 곳에서 영화를 상영했는데, 나는 돈을 내지 않으려고 다른 소년들처럼 벽을 기어올라가서 영화를 보곤 했다. 그때가 전후 시기였다. 그 당시에 볼 수 있었던 영화란 거의 전부가 미국영화들이었다. 그렇게 영화를 보면서 영화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내 또래의 친구들과는 달리 배우들이 아니라 영화를 만든 감독들에게 주의가 끌리더라. 거의 본능적으로 말이다. 이건 내가 의식적으로 감지해서 일어난 게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내게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니까 영화는 꼭 내가 원한 게 아니었는데도 내 삶 속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이후로 나는 일반 관객의 입장을 벗어나게 되었고 영화가 내 세계 자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것은 내게 일종의 강박관념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시네마테크야말로 나의 진짜 ‘학교’

프랑스의 영화학교 이덱(IDHEC)에 들어갔으나 교수와 다툰 뒤 학교를 나왔다는, 잘 알려진 일화가 있다. 당시 그곳에서의 경험은 어땠는가.

정확히 이야기하면, 내가 학교를 나온 게 아니라 퇴학을 당한 것이 맞다(웃음). 하루는 교수님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360도 파노라마 촬영을 한다는 의미로 칠판에 큰 원을 그린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 교수님은 내 생각을 인정해주지 않고 “너의 천재성은 그리스에서나 가서 발휘하라”고 호통을 치셨다. 그렇게 다툼이 있었는데, 교수님은 교장 선생님에게 가서 나와 그 자신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했다. 당연히 교장 선생님은 교수님을 선택했고 나는 학교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런 걸 보면 그곳에선 진정한 표현의 자유가 많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나는 학교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특히 영화학교의 경우에는 분위기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보통 가르치는 것들, 이를테면 숏-리버스 숏이라든가 이런저런 카메라 앵글 같은 것들은 석달만 지나면 스스로 배울 수가 있다. 동료들과 함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그곳이 곧 학교이지 교사가 무언가를 가르치는 곳이 학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아직 병이 들기 전, 그가 영화를 만들고 있을 때 로마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내가 그를 찾아가자 그는 배우들과 스탭들에게 하던 일을 멈추라고 하고는 아주 수줍은 태도로 나를 맞이했다. 나도, 그도 서로가 아주 만족스러운 만남을 가졌다. 안토니오니에게 나는 파리에서 그의 영화 <정사>를 열세 번째 보고 오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이어가자 안토니오니는 이제는 내 영화 <유랑극단>에 대해서 이야기하자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게 학교라고 생각한다. 사람들과 함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영화를 살아가는 것 말이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라는 ‘학교’가 좀더 당신에게는 중요한 교육의 장이었을 것 같은데.

파리에서 공부할 때 사실 나는 용돈을 벌기 위해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일을 했다. 그러면서 모든 종류의 영화를 볼 수가 있었다. 당연히 나는 시네마테크로부터 교육을 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네마테크에서 모든 영화를 보았다는 말 안에는 영화의 유년기를 보았다는 것도 포함된다. 다시 말해 나는 그런 유년기와 비교해 언제부터 영화가 자기 자신의 언어를 가질 수 있게 되었는가, 하는 것까지도 볼 수 있었다. 예컨대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영화들, 독일의 무성영화들부터 전쟁 중의 영화들, 그리고 전후의 영화들을 보면서 영화가 의식적으로 자기 언어를 갖게 되는 모든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영화는 단지 이미지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이기도 하고 자기 자신의 문법을 가지고 있기도 하기에 이건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건 그 같은 경험이 내가 가야 할 길을 선택하는 데 지침이 되어주었다는 점이다. 시네마테크를 통해 그동안 영화역사에서 행해진 모든 종류의 언어적 시도를 보았다는 경험이 뒤에 내가 나 자신의 ‘언어’를 구성해내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적지 않은 영화비평가들은 당신의 영화가 안토니오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한다. 언젠가 당신 스스로도 당신이 프랑스에 갔을 때가 안토니오니의 시대였다며 그의 영화를 자주 보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신에게 안토니오니란 어떤 존재인가.

나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시절은 안토니오니의 시대라기보다는 그 이전 영화의 초반기가 연장되던 시대라고 생각한다. 즉 프리드리히 무르나우, 칼 드레이어, 미조구치 겐지의 시대였고 내가 열광하며 본 영화들도 그들의 영화들이었다. 당시에 나는 일본영화를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이 워낙 컸기 때문에 미조구치의 영화 10편 정도를 자막도 없이 계속 보았다. 물론 처음에는 그 영화들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계속 보다보니 이해되는 순간이 오더라. 이런 열정은 나 혼자만이 가진 것은 아니었고 당시의 추세이기도 했다. 안토니오니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내가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은 딱 한 가지인데, 바로 한숏이 끝나는 부분의 처리에 대한 것이다. <정사>나 <밤> 같은 안토니오니의 영화들을 보면 하나의 숏을 마치기 전에 다른 감독들이었다면 없어버렸을 시간을 그는 얼마 동안 남겨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보존된 영화 속의 시공간은 특별히 스토리텔링상의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숏의 분위기에 차후적인 감정적 효과를 불어넣었다. 그래서 이런 식의 숏은 마치 생물체처럼 살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나도 그처럼 개개의 숏을 숨을 쉬는 어떤 것으로 만들어내려 하는데 그 점에서 안토니오니와 유사한 데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일종의 여분의 시간이 되는 몇초 안에서 특별한 음악성을 발견했다. 아마도 그런 시간이 제거되었더라면 그 숏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안토니오니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면 바로 이 점일 텐데, 그것 말고 우리 둘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즉 안토니오니가 현재를 말하는 영화감독이라면 나는 기억을 말하는 영화감독이라는 것이다.

롱테이크 숏은 나의 첫사랑

당신의 ‘호흡하는 숏’(breathing shot)은 특히 긴 호흡을 내쉬는 것으로 유명하다. 당신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그런 롱테이크 숏은 언제 어떻게 해서 나온 산물인가.

내가 영화 만들기를 시작한 것은 영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가 아니라 시네마테크에서 많은 영화를 보고 영화의 역사를 알고 난 다음이었다. 그러니까 시네마테크에서의 경험이 내가 영화를 만드는 데에 굉장히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내가 본 많은 영화들은 내게 영화를 만드는 천 가지, 만 가지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이덱 다니던 시절 내가 아주 처음으로 작은 영화를 만들었을 때 그 첫숏부터가 롱테이크였다.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의식적으로 선택을 한 것인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내 안에서 그것이 나온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물론 나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변화를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롱테이크라는) 나의 첫사랑은 끝까지 남아 있을 것 같다. 첫사랑은 첫사랑이게 마련이니까.

1964년쯤, 프랑스를 떠나 그리스로 돌아온 뒤에는 영화비평 활동부터 했다고 들었다.

사실 프랑스에서 그리스로 갔던 것은 다시 떠나기 위한 한 과정이었다. 그런데 이덱을 같이 다니다가 비평가가 된 한 친구가 내게 비평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해서 받아들였다. 그 친구는 당시 내가 어떤 식의 글을 쓸 수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여하튼 프랑스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친구의 제안을 수락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당시의 나 자신도 다소 놀랐다. 아마도 그건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작은 역사는 큰 역사의 우회로라고 생각했다. 여하튼 나는 그리스에 남았다. 영화비평가로서의 나는 당시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리스의 신세대 영화감독들에 대해서 글을 쓴 유일한 사람이었다. 영화에 대한 글쓰기는 나로 하여금 영화를 볼 때 당연히 그 영화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게 함과 동시에 어떻게 하면 그 영화가 또 다른 모습을 가질 수 있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그러니까 영화비평가의 눈과 영화감독의 눈을 함께 가지고 영화를 봤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겪음으로써 결국 영화에 대한 살아 있는 관념, 그리고 살아 있는 시각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내 영화가 염세적이라면 역사가 그랬던 것

아까 당신은 자신을 안토니오니와 비교하면서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감독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그건 당신이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감독이라는 말과도 연관이 될 텐데, 당신의 영화 속에서 다뤄지는 기억 혹은 역사란 실망스러운 것, 그리고 환멸을 주는 것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살았던 시대는 대령들의 쿠데타와 긴밀하게 연관된 시대였다는 점이다. 그런 시대가 내가 역사와 맺는 관계의 촉매제가 되었다. 특히 내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리스의 현대사였다. 그건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역사였다. 내 영화들을 볼 때 고려해야 할 중요한 사실 가운데 하나는 내가 ‘전쟁의 아이’라는 점이다. 내가 태어난 다음해인 1936년에 그리스의 독재시대가 펼쳐졌고, 다섯살 때에는 2차대전의 점령기가 도래했다. 아홉살 때엔 내전이 일어나 사방이 죽은 사람들로 뒤덮여 있던 때였다. 같은 해에 아버지가 체포되는 일이 일어났다. 전쟁에서 비롯된 이런 경험들이 내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고보면 파리에서 보냈던 시기는 그야말로 내게 가장 좋았던 시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유도 누릴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영화도 마음껏 보고 영화에 대해 생각도 많이 하면서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워가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자유로웠던 만큼 사랑도 자주 할 수 있었다. 그런 다음 그리스로 돌아갔을 때 ‘역사’가 다시 내 인생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 역사란 것은 매번 재앙을 불러일으키고 파괴적인 모습을 띠고 있었다. 만일 내 영화들에서 다뤄진 역사가 실망스럽고 환멸적인 것이라고 느꼈다면 그렇게 묘사하는 것도 가능한 일일 것 같다. 사실 그 당시에 비해 이후의 시대가 더 나아진 것이 없으니까 말이다. 예전에만 해도 우리가 추구했던 것은 결코 물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미래를 향한 행진이란 모토를 가슴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의 영화들이 염세적인 것들로 다가오는 데에는 특유의 풍경도 큰 몫을 하는 것 같다. 그 풍경은 항상 안개와 비, 그리고 어둑어둑한 하늘로 음울하게 채색되어 있다. 심지어는 촬영이 지체되어 날씨가 좋아지기라도 하면 다음 겨울을 맞기 위해 촬영을 연기하기까지 한다고 들었다.

각 개인은 저마다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독창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원초의 이미지가 창작자에게는 있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우연히 만나는 이미지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이미지일 수도 있다. 여하튼 어린이이건 어른이건 특별히 개방적이 되는 때, 즉 마음이 열리고 세계에 대한 첫 시선에 눈을 뜨게 되는 때가 있다. 영화감독들은 대개 카메라를 통해서 세계에 대한 그 같은 첫 시선을 가지게 되는데, 내 경우에는 첫 영화의 촬영장소를 찾아다니면 원초적인 이미지가 다가왔다. 그때 내게 온 이미지란 멀리 보이는 산, 고독, 비, 작은 마을을 걸어다니는 검은 옷 입은 여인 같은 것들이었다. 또한 한 노인이 마을의 카페에 앉아서 사랑 노래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르는 모습도 있었다. 이런 이미지가 이후의 내 모든 영화들에 반복해서 돌아온다. 예전과는 조금 다르고 새로운 상태로.

진 해크먼을 데리고 <허수아비>라는 영화를 찍은 미국인 영화감독 제리 셔츠버그를 만난 적이 있다. 그가 내 영화 <안개 속의 풍경>을 봤다며 영화 내내 흐린 날씨를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물어보더라. 그래서 나는 아주 간단하게 “많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필요한 시간만큼.” 셔츠버그 같은 경우는 나와 비교하면 굉장히 많은 예산을 가지고 영화를 찍는 중이었다. 그는 자기가 갖고 있는 돈으로도 내가 하는 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더라. 그러나 문제는 돈이 아니다. 내가 취했던 방식대로 해야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기다려야 한다면 나는 기다린다. 기다리고 나서 원하는 날씨가 되었을 때에는 내면의 풍경을 외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비나 안개 같은 것은 인공적으로 만들어낸다. 그와 관련한 기술적인 문제는 아주 간단한 것이다.

매순간 우리는 ‘집’을 찾아야 한다

<학의 멈춰진 발걸음>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린 국경을 건넜고 아직 여기에 있다. 얼마나 많은 경계를 건너야 우린 집에 도달할 것인가?”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의 이 대사가 특히 인상적인 건 그것이 당신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들- 경계에 선 삶와 경계 넘기, 귀향- 과 관련되기 때문이기도 할 텐데.

‘경계’란 것은 내 영화의 중요한 테마이다. <학의 멈춰진 발걸음>은 ‘경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을 제공하는 영화다. 당시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로 많은 개방이 이뤄졌고 인구의 이동이 많이 일어난 때였다. 그러나 당시에 무너진 것은 단지 외적인 경계일 뿐이지 내면적인 경계라는 문제, 인간과 인간 사이의 단절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학의 멈춰진 발걸음>에서 마스트로이안니의 대사를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게 그런 문제였다. 그런데 그가 영화 속에서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도대체 집(Home)이란 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까지도 던질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집이란 단지 어떤 건물이 아니라 좀더 내면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어떤 균형이 존재하는 곳, 세상과 자기 자신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그런 장소이다. <영원과 하루>의 한 장면에서는 주인공 알렉산드레가 누워 있는 어머니에게 이야기한다. “내 언어를 말할 수 있을 때… 왜 그때에만 내 발걸음이 집에 돌아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죠?” 좀더 깊이 들어가자면, 언어란 무엇인가, 내 자신의 언어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도 던질 수 있다. 하이데거가 말하기를, 우리의 유일한 정체성은 우리 어머니가 말하는 언어에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언어란 것이 곧 집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집이란 완전하지 않은 것일 수 있다. 단지 짧은 순간만 집으로 느껴지다가 그 다음에는 집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매순간 우리는 ‘집’이라는 것을 찾아야만 한다.

당신 영화들의 숏 하나하나는 긴 호흡 안에 인물들의 움직임과 카메라의 움직임 등이 조합되어 상당히 복잡한 궤적을 그린다. 어떤 식으로 그것을 구상하고 실행에 옮기는지 궁금하다.

내가 설계한 롱테이크 안에는 경미하거나 아니면 뚜렷한 움직임이 항상 존재한다. 또한 카메라는 항상 움직인다. 그 결과 내 영화의 숏에는 시간의 흘러감이나 강물의 흐름 같은 느낌이 생겨난다. 그럼으로써 내 영화에는 내적인 음악성이 담기게 되는데, 그것은 그 순간 즉각적으로 감지되는 것이 아니라 차후에 관객에게 어떤 영향을 축적시킨다. 아주 주의 깊은 관객은 아마도 내가 설계한 롱테이크로부터 관능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머리나 심장으로가 아니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관능성이다. 사실 내게는 그와 같은 롱테이크로 영화를 구축하는 것이 가장 쉽다. 10분간에 걸친 롱테이크도 보통 준비에 하루, 촬영에 하루 정도를 소요한다. 반대로 가까이에서 사람의 얼굴을 찍는 것이 내게는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근접 숏에 대해서 나는 청소년기에나 느낄 법한 수줍음 비슷한 감정을 갖고 있다.

당신은 꽤 오래전부터 세계적인 명망을 얻은, 그리스의 유일한 영화감독이다. 어떤 면에서는 그런 점이 당신을 고독한 존재로 보이게도 만드는데.

나는 성격상 원래 고독하다. 영화감독으로서만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도 항상 고독함을 느끼지만 그렇다고 그게 큰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난 나의 고독이 내가 영화 작업을 하는 데 원천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감독이란 재능과는 관계없이 항상 영혼의 눈을 뜨고 깨어 있는 영혼을 가져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정말이지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영화를 촬영하는 순간이다. 촬영을 성공적으로 끝마치면 완벽한 사랑에 비유할 수 있는 충만감을 갖게 된다.

올해 완성된 <울부짖는 초원>은 ‘트릴로지’의 첫편으로 알려져 있다. 나머지 2, 3부의 진행과정에 대해 알려달라.

2부가 될 영화의 시나리오가 거의 끝나가는 단계에 있다. 촬영은 2005년 11월부터 시작되는 겨울에 들어갈 예정이다. 누굴 캐스팅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하비 카이틀과는 계속 연락을 하고 있고 그도 긍정적으로 고려하고 있긴 한데, 영화의 주인공보다 그가 나이가 조금 많기 때문에 결과는 더 두고봐야 알 것 같다. 3부작의 마지막 파트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질지는 신밖에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것은 보도된 바와는 달리 2030년이나 그 이후의 미래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다.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