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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거대함, <나비효과>

과거와 현실을 오가며 그토록 고생을 하고 얻은 깨달음이 고작 ‘현재에 만족하라?

그의 과거는 끔찍했다. 그가 끔찍함을 견디는 법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기억의 끈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과거를 근근이 견뎌냈다. 혹은 끔찍함으로부터 도피했다. 과거의 시공간에서 분리된 채 현재에 안착한 그는 문득 잃어버린 과거가 궁금해진다. 그러나 호기심이 생기는 순간 기억은 복원되고 불행은 시작된다. 뒤늦게 과거의 진실을 대면하려는 자에 대한 현실의 때늦은 단죄일까, 그 끔찍한 과거의 기억을 타자에게 떠넘기고 홀로 현재로 도피했던 자신에 대한 처벌일까.

상처로 가득한 어린 시절의 에반(애시튼 커처)은 종종 기억을 잃는다.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그는 매순간 자신의 기억을 일기로 기록한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자, 그는 상처 입은 어린 시절을 함께 나누던 친구들을 떠나 모범적인 대학생으로 자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예전의 일기장을 들춰보다가 우연히 과거의 기억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 기억과의 대면에 괴로워하던 그는 불행한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는 법을 발견하지만 과거의 상처를 하나씩 지울수록 그를 기다리는 것은 더욱 충격적인 불행이다.

<슬라이딩 도어즈>나 한때 꽤 인기를 끌었던 <인생극장>은 정해진 두 가지 운명의 기로에 선 주인공의 갈등을 보여준 바 있다. 겸손한 선택은 행복으로, 탐욕적인 선택은 어김없이 불행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어떤 운명을 택할지에 대한 갈등 대신 운명을 어떻게 재구성할지를 고민하는 한층 용감해진 인물이 등장한다. 물론 운명에 손을 댄 이 ‘오만한’ 인간에게 신은 걷잡을 수 없는 불행의 벌을 내린다. 할리우드는 이번에도 역시 신을 조롱하는 인간을 참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이 매력적이고 ‘위험한’ 소재는 하나의 교훈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과거는 잊어버리자. 과거와의 대면은 다만 현재를 악화시킬 뿐이다.’ 게다가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흐리는 데 역점을 두어야 할 영화는 그 파괴력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논리적 허점을 자극적인 폭력으로 메우고 있다. 인간 자신의 역사에 대한 죄책감과 책임감 대신 오직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거대함만 남았다.

영화를 본 뒤 든 상념. 부시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말하는 것 같다. 자꾸 과거를 건드리지 말고 현실을 인정하지 그래. 나 대신 앨 고어가, 케리가 당선되었더라면 세계는 지금보다 더 큰 불행에 휩싸였을걸? 시의 적절한 현실 봉합용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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