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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멋, 연애가 아니라 스토킹 영화네, <노트북>

투덜양, <노트북>의 집요한 사랑을 징그러워하다

여자가 남자에게 바라는 순정은 어떤 것일까. 네이버 국어사전은 순정을 순수하고 사심이 없는 감정이라고 정의하고 있지만 정말로 사심이 하나도 없다면 좀 곤란하다. 이를테면 한 시간 늦게 온 그에게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그냥 집에 가라”고 했을 때 순수하고 사심없는 감정으로 “네” 하고 진짜 돌아가는 남자를 원하는 건 아니란 말이다. 그렇다고 나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매일 저녁 회사 앞에서 꽃다발을 들고 나를 기다리는 남자에게 감동받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런 건 지가 보면 순정이지만 남이 보면 스토킹이다.

순정과 스토킹. 도대체 어디까지가 순정이고 어디부터 스토킹이라고 불러야 할지 <노트북>이라는 영화는 과제를 던져준다. 사실 이 영화의 모든 장면은 여기서 순정이면 직선을, 스토킹이면 점선을 따라가시오, 라는 식의 게임보드 같은 느낌을 준다. 먼저 노아가 다짜고짜 엘리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는 장면. 내 보기에는 두번 볼 것도 없이 점선으로 가는 것이 옳다. 물론 한번쯤 거절당한다고 “네, 알겠습니다” 하는 순정도 한심하기는 하지만 어쩌자고 놀이기구까지 세우는 건가. 솔직히 이건 공갈협박이 아닌가. 당장 경찰에 신고해도 시원찮을 사건을 겪고도 다음에 만났을 때 데이트 신청에 순순히 응하는 여주인공이라니. ‘정말이지 너 같은 건 맞고 살아도 싸다’라는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두 번째 전쟁에서 돌아온 노아가 우연히 돌아와 엘리와 약혼자를 본 장면. 진짜 무서웠다. 난 노아가 식당에 들어와 난동을 부릴 줄 알았다. 그 정도의 순정이라면 약혼자를 죽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다행히 그런 사고는 안 부렸지만 그뒤에도 노아는 스토커의 징후를 짙게 보여준다. 내놓지나 말 것이지 신문에 사진까지 찍어가며 판다고 내놓은 집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왜 소가지를 내는가 말이다.

물론 중간에 오리떼 꽥꽥거리는 호숫가 정경과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은 잠시 나의 정신을 혼미하게 했지만 주인공들이 노인이 돼버린 현재로 돌아왔을 때 나는 이 영화는 스토킹 영화라는 심증을 굳혔다. 엘리가 읽어달라는 요구를 했다지만 자식들까지 남처럼 만들어놓고 매일매일 씨알도 안 먹히는 노트를 들고 그녀를 찾아가는 이 심리는 도대체 변태가 아니고서는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다 늙어서 자식들까지 배제하며 젊은 날의 순정을 간직하고자 하는 욕망은 징그럽기조차 하다.

사실 나도 호러스럽게만 이 영화를 본 건 아니다. 마지막에 외출이 금지된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찾아가 안도하는 장면은 찡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노아 같은 남자가 쫓아온다면(별 걱정을 다하기는 한다) 나는 가까운 파출소에 신고하든지, 주변에 덩치좋은 남자에게 부탁해 정리하기를 권하겠다. 순정 좋아하다가 스토킹당하면서 인생 피곤해진 사람 여럿 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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