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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대화, 영화
김혜리 2004-12-24

첫눈이 사납게 내린 이튿날이었다. 출근길 택시에서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비정규직연대회의 노동자들이 타워크레인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는 뉴스였다. 소식을 전한 진행자는 천연스레 말을 이었다. “그럼, 크레인 위에 계신 분들을 연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흠칫 놀랐다. 어어 잠깐, 진짜로? 정말이었다. “위원장님 안녕하세요?” “예, 수고하십니다.” “물은 남아 있나요?” “예, 아직은.” 농성 노동자들은 바람 찬 공중으로부터 휴대폰으로 지상에 안부를 전하고 있었다.

지나고보니 내가 둔감하게 살아온 탓이지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전화의 발달에 영향을 받은 것이 어디 뉴스의 꼭지 구성뿐이겠나. 그러고보니 휴대폰이 나오고 전화의 기능이 다양해지면서 현대를 무대로 한 영화와 TV드라마도 알게 모르게 변모했다. 우선 우리는 혼자 걸어다니며 중얼거리고 군중 속에서 속내를 털어놓는 사람들의 모습에 익숙해졌다. 대화의 미장센은 참으로 다양해졌다. <생활의 발견>에서 예지원이 걸어온 눅눅한 구애 전화를 벌레 밟듯 응대하는 김상경과 그 앞에 펼쳐진 경치 좋은 강변의 대조라니. 핸드폰이 없었다면 맛보지 못했을 미묘한 그림이다. 러브스토리와 미스터리를 비틀기 위해 극중 인물 사이의 연락을 두절하는 일은 예전에 비해 훨씬 복잡한 작업이 됐다. 당신이 멜로드라마나 스릴러의 작가라면 주인공을 산중에 고립시키거나 연인들을 갈라놓기 전에 일단 휴대폰을 분실하거나 배터리가 방전될 만한 핑계를 고안해야 할 것이다. 조지 클루니와 미셸 파이퍼의 휴대폰을 바꿔치기하는 아이디어의 로맨스 <어느 멋진 날>은 끝없이 움직이는 남녀의 통화만으로 스토리를 끌어간다(사실 두 스타의 일정 맞출 일이 줄어든 연출부가 제일 기뻐했을 성싶다). 이쯤은 기본 응용이고 메시지, 자동응답, 다자간 통화 등 플롯의 재료는 많은 영화를 도왔다. <슬라이딩 도어즈>에서 기네스 팰트로는 네 자리 숫자를 누르면 직전 통화번호로 연결되는 영국 텔레콤(BT) 특유의 과잉 서비스 덕택에 애인의 배신을 발견한다.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전화의 역할은 화면 구성과 플롯에 끼치는 영향 이상이다. 세상 속으로 흩어진 소녀들의 엇갈리는 다자간 통화는 화면분할과 결합해 그들의 관계를 일목요연하게 그린다. 스크린 위로 또박또박 흘러 대사 같기도 하고 미술 같기도 한 소녀들의 문자 메시지는 영화와 하나가 되어 반짝거린다.

기술은 발전할수록 스스로의 존재를 지우고 투명해진다. 전화가 추구하는 궁극의 형태는 텔레파시일 것이다. 텔레파시가 무슨무슨 텔레콤 상표 아래 상용화되는 시대의 영화는 어떤 모습일지. 인물의 배치와 이야기의 얼개를 놓고 미래의 시나리오 작가들은 더 심한 두통에 시달리게 될까? 아니면 더 큰 가능성을 만끽할까? 플롯의 고충은 정작 걱정거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텔레파시로 나와 남 사이의 ‘정당한’ 거리가 사라져버린 세계에서도, 극장은 우리가 타인의 인생을- 호기심 많은 교환원처럼- 잠깐 엿듣는 밀실로서 여전히 호객에 성공할 수 있을까?

김혜리 vermeer@cine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