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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최고의 영화, 영화인 [2] - 올해의 한국영화 베스트 5

정직한 시선! 빛나고 값지다

1.

12년간의 끈기와 진정성

한국영화와 한국 다큐멘터리의 역사에 큰 획이 그어진 한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2년간, 500여개의 테이프 분량으로, 800여 시간 동안 기록된, 그래서 “어디에 어떤 내용의 인터뷰가 들었는지 확인하는 데만 반년이 걸린” 역작, 이 올해의 최고작으로 손꼽혔다. 비전향 장기수들의 삶을 기록한 에 대한 의견은 주로 인간을 이해하려는 감독의 시선과 그 시선을 유지하기 위해 견뎌내야했던 영화적 시간의 무게감에 대한 존경으로 모아진다. “처음부터 끝까지 울면서 본 영화는 처음이다. 보는 사람의 감정을 쥐었다 놨다 하면서 감정과 이성을 한꺼번에 움직이는 영화였다”(박찬욱), “그의 카메라를 통해 만나는 것은 비전향 장기수들의 견해, 혹은 어떤 승리가 아니라 그들의 시간의 무게다. 은 카메라의 시간이 역사적 시간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에 대한, 혹은 왜 결국 만날 수 없는가에 관한 뼈아픈 고백이다”(허문영)라는 코멘트들은 모두 그것에 관한 자기식의 느낌과 표현이다. 은 선댄스영화제에서 ‘표현의 자유상’을 수상한 것을 시발로, 각종 해외영화제에 초청받아 호응을 얻었고, 다큐멘터리로서는 보기 드물게 국내에서도 관객과의 성공적인 만남을 가진 사례로 남게 됐다.

2.

문제적 감독의 새로운 도약

우리는 김기덕의 새로운 도약을 목도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의 영화를 둘러싼 시선들이 개안하고 있는 것인가? 데뷔작 이후 에 이르기까지 거의 언제나 논쟁의 중심이 되어온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이제는 다른 차원의 사려깊은 주석들로 채워지고 있다. 김기덕 감독은 올해만 해도 두편의 영화 와 을 내놓으면서 독특한 저예산 제작방식의 효용성을 입증하는 한편, 내밀한 영화적 구성방식에서도 한발 더 나아간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렇게 다시 서술하는 것은 김기덕이 이 견딜 수 없는 실재를 뒤집어 세워서 부정태와 함께 머물러서라도 세상을 견딜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환상을 통해서 같은 이야기의 다른 구조를 만들어내려는 왜상(歪像)효과이다”(정성일)라는 미학적 분석과 함께, “주변화된 남성성의 문제를 여성을 착취, 학대하지 않고 돌파한 영화로 받아들였다. 한국영화의 중요한 토픽인 상처받은 남성이 어떻게 정진해서 다른 주체가 되는가를 보여준 의 상상의 공간은 개념적 세계의 최고봉이라고 봤다”(김소영)는 등 페미니즘 진영의 새로운 비평적 지지까지 얻어냈다. 은 가장 뜨거운 지지를 받은 올해의 극영화 중 한편이다.

3.

판타지의 감성을 깨우다

는 도발적인 영화다. 배다른 아들 셋과 그들의 아버지가 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괴이한 설정 말고도 영화는 막히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신기의 방식을 선보였다. 캐릭터들은 보기 드물게 생생한 방식으로 살아 있고,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이 번지다가 어느 순간 맥락을 새로 짠다. 갈등이 커질수록 그 틈 사이로 갑자기 해결책이 생겨나고, 문제가 꼬일수록 이상한 방식으로 매듭은 지어진다. 는 야릇한 제목처럼 삶의 진흙창에서 아이러니하게 희망을 찾아낸다. 박수무당 역으로 등장하는 장선우 감독의 출연작으로 관심을 모았었지만, 막상 개봉된 영화는 어느 한 인물에 편중된 영화만은 아니었다. “취중진담처럼 삶의 허접함을 드러내다. 용(감)하다”(황진미)같은 애정어린 평에서부터, “귀여워. 그것은 상징계의 법으로 회귀 불가능한 성숙이란 방어가 깨져버린 남성 판타지에 대한 면죄부이기도 하고, 다시 그 남성 판타지가 집약된 여성의 가슴으로의 퇴행에 대한 희구이기도 하며, 온갖 ‘권위’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모든 기호에 대한 철저한 거부, 생성과 변화에 대한 갈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할 것이다”(심영섭)라는 식의 해석도 덧붙여졌다. 상업적으로 성공작이 되지는 못했지만, 는 한국영화가 잠시 놓쳤던 판타지의 어느 감성 한면을 신기하게 두들겨 깨운 영화이다.

4.

디지털 장편영화의 가능성

자기의 세대를 대변하는 영화가 나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2004년은 디지털 장편영화의 새로운 물결이 밀어닥친 해이며, 동시에 같은 저예산, 비충무로 영화가 자신만의 화술을 가질 수 있음을 입증한 해였다. 은 말 그대로 최소의 스탭과 최소의 예산으로 미학적 방식을 추구했고 인정받았다. 모든 인물들은 감독이 평소에 알고 지내는 비전문배우들로 짜여졌고, 그들은 주말마다 한번씩 만나 노는 듯 일하는 듯한 마음으로 영화 한편을 찍어냈다. 영화 속에는 20대 초·중반의 언덕을 맞이한 무기력한 청춘 군상들에 대한 우울한 이야기가 주로 들어 있지만, 무조건 낙망에 대한 영화라고 부르기는 힘들다는 것이 이 영화의 또 다른 장점이다. 은 “정직한 시선! 스타와 자본 없어도 빛나고 값지다”(박평식)라는 제작 방식의 독립성에 대한 성공적 예로 꼽혔으며, “청춘들은 절대적 무기력을 긍정하는 존재다. 성장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영화도 불가능할 것이다”(허문영)라는 세대에 대한 성찰과 영화매체 그 자체에 관한 질문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수작이다. 서려 있는 ‘영화적 창백함’을 뛰어넘을 수만 있다면, 미래를 기대해볼 만한 신호탄이다.

5.

홍상수의 변화 혹은 도전

그동안 상찬 일색의 비평적 상승일로를 걷던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2004년에 들어서 처음으로 부정적인 비판들을 마주해야 했다. 이전 작품 에 대한 집단적 호평들과는 확실히 차별화된 현상이 두드러진 한해였다. 특히, 는 페미니즘 비평담론을 흔들었고, 김기덕 감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잦아진 대신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대상으로 올랐다. 그러나 부정적인 평만 쏟아져 나온 것은 아니다. “여전히, 전폭적으로 홍상수의 시선과 언어를 지지한다”(김봉석)는 국내 지지에서부터, “형식에 대한 관심에서 떠난 그는 시간에 따라 점점 그 형태에 머물게 될 테고 언젠가 고전주의, 달리 말해 불가시성에 이르게 될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이는 이미 가 전하는 ‘메시지’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실뱅 쿠물)는 변화하는 홍상수식 영화의 길목에 초점을 맞춘 의견들이 나오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는 마치 이 그러하듯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작품이기도 하며, 그의 영화가 처음과 끝을 말하지 않고 하나의 질문에 다른 답과 다른 질문을 다시 붙여가는 과정임을 반영한다. 그의 다음 영화 은 다시 두명의 남자와 한명의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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