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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우리가 놓친 영화 [2] - 일본

91살 감독의 빛나는 독립영화 정신

신도 가네토

노년의 예술가의 작품이라면 그것은 젊은 날의 분노를 용서와 화해로 삭인, 세상을 관조하는 고요한 것임에 틀림없다. 흔히 ‘노예술가가 말하는 인생의 교훈’이라 불리는 것 말이다. 부끄럽지만 나에겐 그런 선입견이 있었다.

이런 굳어진 머리를 신도 가네토(新藤兼人) 감독의 (ふくろう)가 내리쳤다. 는 등을 통해 일본 독립영화의 상징으로 살아온 신도 감독이 91살인 2003년 감독, 미술, 시나리오를 도맡아 완성해 2004년 일본 전국에서 순차 개봉한 작품이다. 좀더 놀라운 건 90대 감독의 작품에 넘치는 비판정신과 저항의 에너지다. 저예산영화라는 조건에 맞춰 무대극 같은 1세트 형식을 끌어오며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웃음’이 많은 블랙코미디를 만들어냈다. 평론계나 영화저널리즘이 이 현역 최고령 감독의 신작에 “고개를 숙인다”며 존경의 글을 앞다퉈 내보낸 것도 이 지칠 줄 모르는 실험정신 때문이다.

1980년 일본 도호쿠지방의 산간지역의 휑한 집 한칸. 나무껍질을 벗겨 국물을 우려 마시고, 살아 있는 거라면 쥐도 식량으로 마다않는 거지 같은 몰골의 어머니와 딸이 있다. 무언가 결심한 그들은 미친 듯 웃으며 몸을 닦고, 집안에 남아 있던 장례식용 깃발과 이불보자기를 찢는다. 장례식용 깃발은 검정색과 흰색 스트라이프의 모던한 원피스로, ‘희망언덕 개척단’이라고 선명하게 글씨가 새겨진 빨간 이불보자기는 섹시한 탱크톱으로 변신했다. 어머니는 마지막 남은 동전 2개를 집어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는 1974년 신도가 촬영의 자료 수집차 갔던 지역에서 들었던 실화를 토대로 했다. 한 개척 마을에 남은 모녀는 살기 위해 댐공사 인부들을 상대로 매춘을 하지만, 소문이 퍼져나가자 어느 날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2차대전 당시 일본 정부는 만주 개척사업을 위해 30만명의 농민들을 내보냈지만, 패전 뒤 돌아온 이는 반 정도. 조상의 묘까지 없애고 만주로 향했던 이들에겐 돌아갈 땅이 없었다. 일본 정부가 이들에게 대신 내준 땅은 수십년을 개간해도 될까말까한 불모지였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수년 만에 마을을 떠나 부랑자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국가로부터 두번 배신당한 존재들이다.

의 모녀는 하지만 현실처럼 비참하게 패배하지 않는다. 그들은 남자들을 상대로 인생을 이야기하고, 선금을 받은 뒤 정성스럽게 ‘섹스’를 해주고, 마지막 특별 서비스로 소주를 먹인다. 공사장 인부, 수도공사 인부, 전기공사 인부, 직원을 찾으러 온 인력 감독…. 차례차례 소주를 마신 이들은 거품을 물고 돼지나 닭소리를 내며 쓰러진다. 이 모든 걸 지켜본 건 산속의 올빼미뿐. 유미에와 에미코가 떠난 뒤 이 마을에선 9구의 유골이 발견됐다.

이처럼 는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멀다. 이전부터 강한 모성, 여성을 자신의 주제로 삼아온 신도 감독은, 에선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성들에게 희생은 그만두라고, 구제불능의 남성을(궁극적으로 국가를) 혼내주라고 선동한다. 그리고 기꺼이 여성들의 편이 된다. 쓰러지는 남성들이 남기는 한마디는 각각 “좋았다”, “성공을 빈다” 등등이다.

같은 세트에서 반복되는 살인극의 패턴에 지루해질 법도 하지만, 탄탄한 배우들의 연기 덕분에 밀폐된 공간의 긴장감은 오히려 상승된다. 어머니 역의 오오타케 시노부는 신도 감독이 출연을 약속받은 뒤 시나리오를 썼을 정도. 오오타케는 1994년 죽은 신도 감독의 아내이자 영화 파트너인 배우 오토와 노부코의 뒤를 이을 만한 신도 감독의 ‘뮤즈’라는 평을 받으며 로 모스크바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딸 역엔 의 이토 아유미, 9명의 남성들엔 에모토 아키라, 다구치 도모로 등 널리 알려진 연기파 배우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신도 감독은 이제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영화를 계획 중이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진 단 수초간의 삶과 죽음의 모습을 극명히 그리는 작품이다. 그는 1912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예산은 20억엔, 쉽지 않은 자금이지만 신도의 도전은 지금도 계속 중이다. 이것이 일본 독립영화의 정신이다.

재패니메이션의 새로운 진화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의

오시이 마모루, 오토모 가쓰히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 개봉하고 완전히 컴퓨터그래픽으로만 만들어진 , 실사와 애니메이션 또는 CG의 경계를 실험한 등이 속속 등장한 2004년 일본 애니메이션계는 그 어느 해보다 풍작이었다. 이처럼 ‘별들의 전쟁’이 벌어졌던 한해, 12월 발표된 제8회 문화청미디어예술제는 의외의 작품에 올해의 애니메이션 대상을 돌렸다. 장·단편 등 294편의 출품작 가운데 는 물론 까지 우수상으로 밀어낸 작품은 . 극장판 등을 통해 ‘천재 애니메이터’라 소문 자자했던 유아사 마사아키(湯淺政明)의 장편 데뷔작이자, 를 제작한 스튜디오 4℃의 작품이다.

오해가 없길. 여기서 ‘의외’라는 건, 이 대중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는 의미일 뿐이다. 사실 로빈 니시의 동명의 컬트만화를 원작으로 삼은 이 작품이 대박을 터뜨리기란 태생적으로 힘들었다. 하지만, 오시이나 미야자키만이 재패니메이션의 전부라 생각하지 말라! 단언컨대 은 황당한 스토리와 뻔뻔스런 상상력으로 보는 이의 두손 두발을 다 들게 만드는 작품이다. 폭력과 에로티즘, 유머가 맛깔스럽게 배합된 이 작품에 대해 어떤 평론가는 “재패니메이션의 새로운 진화형”이라고 극찬했고, 마니아와 자발적 응원단이 줄을 이었다. 해외 배급을 조엘 실버가 맡아 화제인데 그 과정도 저돌적인 스튜디오 4℃ 답다. 홍보를 위해 도쿄를 찾은 실버의 호텔 방에서 다나카 에이코 대표(일본 애니메이션업계 유일의 여성 CEO) 등이 ‘기습적으로’ 하이라이트를 테이프로 틀었고 자동차 추격장면에 매료된 실버가 덜컥 해외 배급을 약속했다는 것.

전반부는 환생 스토리에, 후반부는 버전이다. 소식이 끊겼던 첫사랑 명을 몇년 만에 만난 지리멸렬한 청춘 니시가, 명의 아버지를 찾는 사채업자들에 얽혀 총을 맞아 죽었다가 다시 살아 돌아와 명과 명의 언니를 데리고 도망을 갔는데 야쿠자에 쫓기다가 빠진 구멍이 알고보니 고래 뱃속이더라, 라는 이야기. 그 고래 뱃속에서 30년을 살아온 노인이 니시 일행을 만나 놀라서 더듬거리며 건넨 첫마디는 이거다. “나, 나, 라디오 갖고 있어요.”

글로 옮기는 의 스토리는 이처럼 ‘믿거나 말거나’ 수준이기도 하거니와, 전혀 중요하지도 않다. 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체험할 수밖에 없는 천상 애니메이션이다. 위기에 처한 첫사랑을 구하기는커녕 엎드려 벌벌 떨다가 얼떨결에 엉덩이에 야쿠자의 총을 맞고 죽은 니시가 ‘신’을 만나는 장면. 이 장면만으로도 본전 생각은 안 난다. 담배 피우는 물고기부터 피식 바람빠지는 풍선, 냄새 폴폴 나는 똥까지 수십 가지 버전으로 잠시도 쉬지 않고 얼굴이 변하는가 하면, “이제 20살인데 죽는 건가요?”라고 절규하는 니시에게 “나 데이트 있거든, 조오기 조오기로 곧~장 걸어가면 이제 넌 사라질 거야”라며 콧노래를 부르는 신의 모습이란,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걸 초월한다. 배가 부르게 먹고 나면 배가 볼록 튀어나오고 놀라면 목이 쭈욱 늘어나고 눈알은 뿅 튀어나오는 식의 만화적 표현과, 똥 오줌 튀는 대사는 기본이다. 때로는 인물의 몸과 윤곽선의 그림 속에 목소리를 연기한 배우들의 실제 얼굴만 심어놓기도 한다. 사실적인 세밀한 그림부터 그래픽 같은 그림, 과장과 왜곡이 심한 형태까지 실사와 2D, 3D를 자유자재로 섞은 그림체를 대사와 심리에 따라 바꾸는 타이밍이 기가 막히다. ‘로보’ 등의 활동으로 유명한 야마모토 세이치의 음악도 빼놓을 수 없다. 은 좁은 의미의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움직이는 그림’을 보는 쾌감을 새삼 일깨워주는 영상작품이다.

쿡쿡거리며 가볍게 즐겨도 그만이지만 103분이 후딱 지나고 나면 남는 여운은 꽤 길다. “나는 돌아갈 거야. 무엇보다 힘차게, 앞을 향해, 쭉쭉, 즐겁게, 생기 넘치게, 모든 힘을 다해 해보는 거야!”라 외치며 살아 돌아온 니시는 고래 안에서도 말한다. “자신을 끝까지 믿으니까 살아 돌아온 거야. 솔직하게, 성실하게. 믿는 그대로 행동하는 거야말로 모든 벽을 부수는 무기야.” 마지막, 니시의 발 밑에 다시 도입부와 똑같은 도시와 사람들의 모습이 펼쳐진다. 하지만 그 느낌은 전혀 다르다. 마인드 게임을 치른 니시와 우리는 더이상 지지부진한 청춘이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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