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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하의 애버뉴C] 12th street / 테디 베어, 죽은 염소, 쿠바 그리고 카메라

아녜스 바르다의 사진을 둘러싼 세편의 다큐멘터리

나는 사진 찍는 것을 심하게, 좋아하는 편이다. 틈만 나면 사진을 찍던 아버지의 영향이었는지 아주 어릴 때부터 가만히 뭔가를 보고 있으면 사진에 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솟구쳐 올랐다. 초등학교 때 친구에게 속아서 만 원인가를 주고 산 아주 질 나쁜 카메라부터, 어린이 잡지 중간쯤에 끼워있던 점선을 따라 자르고 접으면 사진기가 되는 마분지 카메라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단순한 핀 홀 카메라였던 것 같다), 집집마다 있던 기본형 자동 카메라는 기본이거니와 오래된 수동 카메라에, 폴라로이드, 로모, 디지털 카메라에 스티커 사진기까지. 인생에서 사진기와 함께 하지 않았던 순간을 기억하기 힘들다. 특히 요즘같이 ‘17분 칼라’ 같은 가게가 나오기 전에는 필름을 맡기고 기다려야 했던 하루, 이틀이 내 인생에서 제일 박진감 넘치고, 긴 시간처럼 기억될 정도다.

특히 뉴욕에서 살기 시작 한 이후로는 혹 카메라를 잊고 외출할라치면 불안함에 집에 빨리 들어가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그런 날이면 꼭 다시는 잡지 못할 것 같은 멋진 순간이 눈 앞에서 펼쳐지는 불행이 일어났으니까. 내 인생에서 크게는 인류의 역사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순간의 증거를 남기고 싶은, 그렇게 포획해 박제해 버리고 싶은 불타는 욕망은 다른 일에는 여유만만인 나 같은 사람에게도 ‘가방에서 카메라 빼서 렌즈 열고 사진 찍기’ 의 속도가 서부영화 보안관이 총 뽑는 시간보다 빠르도록 훈련시켜 놓고야 말았다. 물론 가끔은 '눈을 통해 뇌로 저장되는 기능이 점점 퇴화되는 게 아닐까', '렌즈를 통해 저장된 이미지의 진실은 무엇일까' 같은 기우에 가까운 무거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볼 때도 있지만, <메멘토>를 통해 크리스토퍼 놀란이 머리 아프게 주지시킨 대로 어쨌거나, 저쨌거나, 기록이 기억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던가.

아녜스 바르다가 전직 사진작가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바다. <5시와 7시까지의 클레오>나 <행복>등의 영화로 국내에서 알려진 프랑스 여성감독 아녜스 바르다는 영화감독이 되기 전 사진작가로 활발히 활동했었던 사람이다. 이런 그녀의 이력을 생각해 본다면 사진과 영화 사이에 놓인 그 다리의 견고함과 깊은 역사 역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맨하탄에서 오는 3월 1일까지 상영예정인 <씨네바르다포토>(Cinevardaphoto)는 그런 아녜스 바르다의 사진을 둘러싼 세 편의 다큐멘터리를 묶은 영화다. 가장 최근인 2004년에 만든 <이데사, 테디베어 그리고…>(Ydessa, the Bears and Etc)는 큐레이터이자 콜렉터인 이데사 헨델스의 ‘테디베어 사진전’을 둘러싼 다큐멘터리다. 얼핏 보기엔 테디 베어를 둘러싼 평범한 테마전시이거나, 편집증의 산물처럼 느껴지는 이 콜렉션을 자세히 보면 그곳에 서려있는 나치의 망령이, 전후의 세계의 풍경이 보인다. 실재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인 부모를 가진 캐나다인인 이데사가 전시를 뮨헨에서 연대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사진들로 가득 매워진 전시장을 통과하면 나오는 또 다른 전시장에는 텅 빈 공간에 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채 기도를 올리는 히틀러의 인형이 놓여져 있다. 그렇게 비로소 저 순수한 천진한 곰 인형과 함께한 수 천장의 사진이 한 시대를 짓누른 광기의 폭력을 몹 샷으로 증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소개되는 1982년 작 율리시스(Ulysses) 는 그보다 20년 전에 바르다가 찍은 한 장의 사진을 둘러싼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의 복원이다. 한 바닷가에 죽은 염소와 나체의 남자 그리고 한 아이가 있는 그 사진을 보며, 바르다는 기억하는 것과 사라진 것, 그리고 남은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마지막 작품인 1963년 작 <안녕! 쿠바> (Salut les Cubains)는 쿠바혁명이 일어난 직후 바르다가 찍은 사진들로 구성된 30분 가량의 다큐멘터리다. 그녀의 사진첩이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 마다 쿠바의 모든 것들이 한대 어울려 차-차-차차차- 춤을 춘다. S자 곡선을 가진 쿠바처녀의 몸이, 사탕 수수농장의 청년들의 땀이, 혁명이, 시대가, 사회가, 베니 모레의 신나는 리듬이, 굵직한 시가와 카스트로가 체 게바라와 구렛나루가 흑백사진을 넘어 다시 걸어 나온다. 그렇게 바르다는 총소리가 오가는 가운데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낭만적이었던 그 도시의 40년 전 풍경을 현재의 스크린으로 그대로 옮겨온다.

사실, 우리의 눈은 프레임 안으로 포획한 이미지만을 보는 것 같지만, 우리의 뇌는 사진 뒤의 풍경에 닫는다. 그래서 같은 사진이라 해도 그것은 모두에게 ‘다른 사진’ 그리고 ‘새로운 사진’이 된다. 나는 그래서 사진이 좋다. 마음의 시선이 가지는 방향과 깊이가 물리학적인 포커스와 심도로 치환되는 매력적인 작업. 영화에 비해 더욱 은밀하고 사적인 행위. 그래서 나는 여전히 사진 찍기란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취미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고다르 영화를 보고 약간 좌절한 끝에 “여전히 난 고다르를 잘 모르겠어요” 라고 투덜거렸을 때 한 선배는 나에게 “내 경험으로는 고다르를 아는 척하는(아는 게 아니라) 순간부터 마음이 영화로부터 멀어진다. 남의 언어로 자기 소감을 이야기하는 순간부터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5년 뒤쯤 다시 만납시다 고다르씨, 하고 일단 접어둬라.”라는 이메일을 보내왔다. 하지만 5년 뒤 든, 2년 뒤 든, 영화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영화는 나에게 점점 무거워질 것 같다. 그것은 즐거움을 직업으로 택한 자에게 내려진 공평한 불행일 꺼 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진만은, 죽는 순간까지 내 인생 최고의 취미로 남겨 둘 작정이다. 그리고 언제라도 카메라만은 깃털처럼 가볍게 잡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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