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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자가 이긴다”, <69 식스티나인>
김수경 2005-03-22

‘유일한 복수 방법은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믿었던 소년들이 들려주는 아름다운 1969년의 추억.

비행기가 날고 팝아트풍의 크레딧과 크림의 몽환적인 <White Room>이 흐른 뒤, 화면에는 일본 나가사키 사세보항의 철조망 앞에 선 야자키 겐스케(쓰마부키 사토시)가 등장한다. 야자키가 학교의 소문난 얼짱인 야마다(안도 마사노부)와 친해지면서 본격적인 이야기는 출발. 희대의 거짓말쟁이, 말만 앞서는 순발력의 제왕 야자키와 책임감의 화신 야마다는 랭보를 통해 쉽게 단짝이 된다. 축제를 꿈꾸는 야자키의 야심은 8mm카메라를 빌리러 간 전공투 사무실에서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얼떨결에 이루어낸 바리케이드 봉쇄의 현장에서 포만감을 느끼는 그들에게는 만만치 않은 대가가 기다린다. 열일곱살 소년에게 아름다운 소녀야말로 혁명의 깃발이다. 소년은 그 깃발을 따라 바리케이드 봉쇄, 무기정학, 축제를 기꺼이 겪어낸다. 주인공 야자키에게 개벽천지란 사회주의의 완성이나 인민의 해방이 아니다. 그저 영어연극반의 마츠이 가즈코(오오타 리나)의 연인이 되는 것만이 그의 ‘레종 데 트르(존재의 이유)’다.

<69 식스티나인>의 원작소설인 무라카미 류의 <69>는 1990년대 초 국내에서 인기를 끌던 시바타 쇼의 <그래도 우리 젊은 날>,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와 궤를 이루는 일명 후일담소설이다. 이상일 감독의 신작 <69 식스티나인>은 원작소설이 보여주던 미묘한 긴장과 아이러니를 장르적인 청춘영화의 문법으로 단순화한다. 야자키는 과도하게 쾌활하기만 하고, 야마다는 수동적인 존재로만 묘사된다. 단선적인 캐릭터로 인해 그들의 인생을 뒤바꾸는 사건들은 유쾌한 해프닝으로 치부된다. 1969년 격동의 일본사회에서 개인, 특히 어린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해프닝뿐이라는 듯 밝은 면만 비추는 영화의 화법은 수긍하기 어렵다.

소설에서 야자키의 거짓말과 실제상황을 대조하며 이들이 겪는 정신적 혼란이나 삶의 긴장을 세밀하게 조합했던 점을 상기하면 더욱 그렇다. 꽃다운 그들이 왜 여자와 축제에 모든 것을 걸게 되었는지 영화는 구체적으로 원인을 설명치 않는다. 그로 인해 그들은 그저 감수성이 예민하고 발랄한 10대 소년으로만 남겨진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에서 야자키나 야마다가 매력적인 것은 그들이 어설프고 거칠지만 스스로 생각한 것을 믿는 인간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바리케이드 봉쇄를 마친 야자키가 반 아이들에게 쉴새없이 모험담을 떠들어대며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대목을 읽어보자. “이런 고등학교에서 바리케이드 봉쇄를 사상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학생이 있을 리 없다. 그렇기 때문에 즐기는 자가 이긴다”고 그는 되뇐다. <69 식스티나인>에는 그러한 자조와 반성에서 비롯되는 삶의 의지가 보이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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