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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황정민 [1]

감독 최동훈이 만난 배우 황정민

“생동하는 영화를 위한 히든카드”

<달콤한 인생>에서 선우(이병헌)는 수많은 남자를 상대로 ‘의리없는 전쟁’을 벌이지만 유독 도드라진 잔상을 남기는 장면이 경쟁 조직의 중간 보스 백 사장과의 대결이다. 띄엄띄엄 등장하는 ‘특별출연’임에도 깊은 인상을 남기는 건 백 사장이란 캐릭터가 워낙 독특하기도 하지만 그 겉옷의 알맹이가 배우 황정민인 이유가 더 크다. ‘어? 황정민이란 배우가 저랬나?’ 싶을 정도로 그는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새겨져 있던 이미지를 깨끗하게 뒤집는다.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의 드러머 강수와 <YMCA야구단>(2002)의 광태가 초기 이미지를 만든 탓도 있을 것이다. 순박하고 어리숙한 캐릭터. 황정민은 캐릭터와 자연인 황정민이 잘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착한 연기’를 해보였다. 심지어 수년간 같은 무대에서 땀을 흘렸던 뮤지컬 <지하철 1호선>에서조차 그의 캐릭터는 착하거나 천진무구한 쪽이었다.

사실, 임순례 감독이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지상 최대의 오디션’에서 1천여명 가까운 지원자 가운데 “마치 보석으로 깎이기 전, 거친 원석 같다”며 그를 캐스팅했을 때나, <범죄의 재구성>의 최동훈 감독이 순한 강수가 강짜를 부릴 때 드러나는 폭력적인 에너지에 유독 주목했을 때 그에게선 이미 온순함과 독기가 공존해 있었다. 아마도 양극단의 조합이 효과적으로 섞여나올 때를 기다렸을 것이다. <로드무비>에서 심상치 않은 과거를 지니고 세상을 등진 채 살아가는 노숙자 대식의 얼굴이 짙은 음영으로 서늘한 느낌을 주면서도 마초일 수도 있다는 인상을 주었던 것이나 <바람난 가족>에서 사회정의파 먹물 주영작의 냉정하고도 야비한 이중성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던 건 그 전초전일 것이다. <달콤한 인생>의 백 사장이 악랄하고 잔인하기 그지없지만 어쩐지 미워하기 힘든 매력을 보여주는 건 황정민 안에 애초부터 머물던 에너지의 밀도가 더 높아졌기 때문일 것이고.

<죽어도 좋아>의 박진표 감독은 실화를 근거로 한 로맨스 <너는 내 운명>에서 전도연과 황정민을 투톱으로 내세우면서 황정민을 ‘비장의 무기’로 꼽았다. 그간의 경력이나 가능성에 비해 덜 주목받아왔으나 드디어 물을 만났다며. 서울에서 400km 떨어진 전남 순천의 <너는 내 운명> 촬영장으로 그를 만나러갔다. 이 먼길에 <범죄의 재구성>의 최동훈 감독이 동행해주었다. 며칠 전 <달콤한 인생>을 본 그가 술자리에서 “아니, 이병헌이나 김영철 선배도 훌륭하지만 황정민을 왜 인터뷰하지 않나요? 나라도 나서고 싶네요”라고 호기롭게 했던 말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주연급이던 <바람난 가족> 때조차 생활고로 몸으로 때우는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놀라운 이야기가 흘러나올 때쯤 인터뷰가 끝났다. 전도연씨가 사온 <달콤한 인생> 축하 케이크를 안주삼아 술자리가 시작될 때쯤, 어느덧 그는 에이즈에 감염돼 평지풍파를 맞는 은하(전도연)를 목놓아 사랑하는 농촌 노총각 석중이 되어 있었다. 말은 없으나 약간의 홍조로 깊은 열정을 살짝 드러내면서. 일부러 찌운 15kg의 살이 한몫 했겠지만 날렵하고 부리부리한 백 사장은 깨끗이 증발해 있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YMCA야구단>

최동훈 | <달콤한 인생> 이야기부터 하죠. 원래 백 사장 역이 아니었다고요?

황정민 | 처음에는 뢰하 형이 한 문석 역이었어요. 김지운 감독님하고 리딩을 많이 했는데 문석보다는 백 사장이 더 낫겠다고 느끼신 모양이에요. 갑자기 백 사장을 해보자고 그래서 도대체 백 사장이 누구야 하고 대본을 보는데 없는 거예요. (웃음) 뭐 대본에 있긴 있는데, 감독님이 내가 하는 연기 스타일이 맘에 안 드시는가보다 했어요. 굉장히 집요하신 분이잖아요. 감독님하고 둘이서 문석 리딩할 때 아주 집요하게 파고들어가서 좀 무서웠어요. 부담스럽고. 솔직히 배우들 리딩 하는 거 좋아하지 않잖아요. 아니 그렇다기보다 리딩에 쏙 빠져들기 힘들잖아요. 그래서 맘에 안 드나보다 하고 못하겠다고, 감독님하고 꼭 하고 싶지만 이번에는 기회가 아닌가보다 하고 말씀을 드렸죠. 겁먹은 거죠. 따지고 보면, 내가 그 역할에 딱 붙을 수 있는 자신이 없었던 거죠. 그러고나서 <여자, 정혜>를 찍고 있었는데 촬영장으로 찾아오셨어요. 놀랐죠. 그때 용기를 가지라는 투로 말씀하시진 않았지만 제가 느꼈던 감정이 그랬던 거 같아요. 네가 해도 충분히 잘할 수 있으니 같이 해보자고. 그래서 하게 됐어요. 감독님 힘이 컸던 것 같아요.

최동훈 | 김지운 감독님의 자세, 그거 제가 배워야 할 것 같네요. 백 사장 역을 하기 위해 준비를 했을 텐데?

황정민 | 많이 나오면 대본이 그 역할에 대해 설명을 다 해주잖아요. 백 사장 같은 경우는 툭 나오고 툭 나오고 툭 나오고 끝나요. 딱 세번. 그래서 딱 나올 때 이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다 보이길 바랐어요. 그러려면 임팩트가 있어야 하죠. 실제로 그렇게 찍는 게 아니라 배우 스스로 그런 식으로 가져가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일단 많이 보여줘야죠. 불필요하면 감독이 쳐내고 잘라내면 되니까. 그래서 아이디어를 많이 냈어요. 특히 외모에 대해서.

내 몸 속에 백사장을 담았어요, 그 인생을

최동훈 | 입가의 스카페이스도?

황정민 | 네. 롤랑 조페 감독의 <시티 오브 조이>를 보면, 인력거 집 딸이 볼모로 잡혀서 입이 찢기는 장면이 있는데 그게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최동훈 | 외모에서 백 사장의 과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특징이었어요.

황정민 | 원래는 그런 것들 일부러라도 신경 안 쓰는 편인데, 많이 안 나오니까 신경을 썼어요.

최동훈 | 걸음걸이, 말투도?

황정민 | 그건 일부러 하려고 해서 되는 것이라기보다 감정이 중요한 건데. 이런 사람 있잖아요. 평범한 사람은 아니고 굉장히 사이코인데 평범한 척하는 사람.

최동훈 | 오케이!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백 사장이 겉으로 하는 행동은 좀 착해 보여요. 죽는 사람도 위로해주고. 별일 아냐 하면서. 근데 진짜진짜 나쁜 놈이거든요. 겉포장은 착한 사람처럼, 화를 낼 때도 남 눈치를 좀 보면서 내가 여기서 이렇게 화를 내면 안 되지 하고 신경쓰는 인물.

황정민 | 실제로 주먹쓰는 사람들을 보면 눈을 못 마주쳐요. 대개대개 순하게 이야기하는데도 눈에 살기가 있어요. 감정적으로 이런 게 쌓여 있으면 말투나 행동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 같아요.

최동훈 | 연기할 때 행동보다 어떤 인물인지 그 정신상태를 가져가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거죠?

황정민 | 감정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예전에 MBC의 <이경규가 간다> 코너에서 양심냉장고를 처음 탔던 사람 인터뷰를 하는데 뭔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 거예요. 자막이 나오긴 하는데, 중요한 건 그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는 거죠. 그만큼 말이 필요없고, 나중 문제라는 거죠.

최동훈 | 예를 들어 <마라톤 맨>에서 로렌스 올리비에랑 더스틴 호프먼이 같이 나왔는데, 잠 못 자고 마라톤을 하고 온 상태에서 로렌스 올리비에랑 만나는 장면이 있어요. 더스틴 호프먼이 실제로 잠 안 자고 막 뛰어서 촬영장에 온 거예요. 로렌스 올리비에가 여유있게 커피 마시고 신문보다가 호프먼에게 너 왜 이렇게 상태가 안 좋니 묻고는 하는 말이 연기로 하면 되잖아, 하더라는 거죠. 황정민씨는 말하자면 로렌스 올리비에보다는 더스틴 호프먼쪽인 거죠. 자신의 정신상태를 계속 그쪽으로 몰아가는.

황정민 | <너는 내 운명>의 석중 같은 경우, 내가 그 사람한테 다가가서 너 어떻게 살았니라고 물어보고 이해를 해야지, 야 이리 와봐 너 어떻게 살아? 이럴 순 없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은 절대로 진실을 얘기하지 않죠.

최동훈 | 백 사장의 첫장면은 정말 재밌었어요. 전화 안 받네, 끊어? 그러다가 부하를 막…. 근데 백 사장의 가장 재밌는 디테일은 피를 자기 몸에 안 묻히는 거예요. 그게 보는 사람이 느낄 정도로 굉장히 세밀하게 나와요.

황정민 | 백 사장은 얼굴의 흉터 때문에, 그게 어렸을 적에 생긴 건데, 사람들이 어? 하고 다시 보게 되는 콤플렉스가 된 건데 그걸 어떻게든 감추려고, 옷 같은 걸로 꾸밀 수 있는 반대쪽으로 자꾸 가려고 하거든요. 이런 얘기를 하니까 감독님이 그러면 피 묻히는 걸 싫어하면 어떨까 했던 거죠. 제가 하나둘을 얘기하면 제3자가 그 얘기를 듣고 플러스를 만들어가고, 또 감독님이 얘기하면 내가 또 고민하고 또 플러스 알파가 되고. 이런 상승작용이 중요한 것 같아요.

<바람난 가족>, 내 최고의 연기

<로드무비>

<바람난 가족>

최동훈 |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죠. 디렉팅을 정확히 주는 감독과 느슨하게 주는 감독이 있는데 어느 쪽이 맞는 것 같아요?

황정민 | 양쪽 다 해봤죠. <바람난 가족>의 임상수 감독님은 전자의 경우고. 저는 느슨하게 주는 쪽이 편한 거 같아요. 기본 틀거리가 있어서 거기서 벗어나는 건 제 스스로 용납하지 않지만. 연극을 해서 그런 것 같아요. 공연 중간에 관객의 반응이나 그날의 변수들에서 살짝 빠져나오고 덧붙이는 재미가 있거든요.

최동훈 | 저는 <범죄의 재구성> 하면서 배우들한테 정확하게 지시하지는 않았는데 어차피 그 신이 해야 할 목적이 있으니까요. 리허설 때 어떻게 하세요라고 하지도 않아요. 동선은 미리 정해놓지만. 그런데 보고 있으면 놀라운 일이 벌어져요. 자기네들끼리 뚝딱뚝딱 뭘 만들어서 와요. 가끔 그런 생각해요. 시나리오를 같이 쓸까. 그러면 얼마나 재밌게 나올까.

황정민 | 이게 맞다, 정확하다, 고 하기보다 자기의 취향이 있는 거니까. 그런데 <바람난 가족>을 찍으면서도 굉장히 재밌었어요. 어떤 면에서는 제가 해온 작품 중에서 최고의 연기는 주영작이란 캐릭터라고 생각하는데.

최동훈 | 100% 동의합니다.

황정민 | 나랑 반대되고 나랑 친하지 않은 인간이었기 때문에, 내가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되지 않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자꾸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멀어지는 친구였기 때문에 굉장히 힘들었어요. 중요한 건 작품을 하면서 맘을 다 놨다는 거죠. 대본도 안 보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일어나서 가고. 근데 완성된 영화를 보고 ‘어, 이런 면이?’ 하고 깜짝 놀랐어요.

최동훈 | 인물을 만들다보면 중간쯤 가면 내가 만드는 게 아니라 이 인물이 나를 조종해서 그 이야기를 가게 만들어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바람난 가족>도 그런 경험이 아니었을까요?

황정민 | 찍을 때는 스스로에게, 저는 일에 대해서는 굉장히 열심히 하는 케이스인데 이렇게 막 해도 되나, 아무 생각없이 해도 되나 되묻고 싶을 정도였는데 말이죠. 그래서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기도 했는데 어쨌든 제 스스로 묶어놓은 것을 이 작품을 통해 많이 풀어놓을 수 있었어요.

최동훈 | 제가 <눈물>의 조감독이기도 해서 임상수 감독님이랑 친하잖아요. 황정민이란 배우에 대해 물었더니, 촌놈이지 뭐, 그러더라고요. 아주 냉정하고 쿨하지 못하다는 거지. 보수적인 이미지인데, 촬영 때는 그렇게 했을지 몰라도 결과를 놓고 보면 지금까지의 작품 중에서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연기가 좋았어요. 임상수 감독님과 트러블이 좀 있었나요?

황정민 | 아뇨. 전혀 없었어요.

최동훈 | 아니 있었다고 해도 저는 상관없는데.

황정민 | 진짜로 없었어요. 감독님이 연기를 잘하시니까 잘 보여주기도 하셨고. 내 생각을 많이 안 하려고 배제하려고 했던 작품인데 찍고 나서 영화를 보면서 나 혼자 하는 게 아니구나. 배우 스스로 끌고 가려는 부담감이 없지 않은데 그것조차도 필요없구나 싶었죠.

최동훈 | 그때 저랑 같은 장면에 나왔잖아요(한국전쟁 때 숨진 유골 발굴 현장에서 황정민은 유족들의 변호사로, 최동훈 감독은 순경2가 돼 유족들과 몸싸움을 벌였다). 그곳이 추워서 불을 쬐고 있는데 엑스트라 조합에서 온 아저씨들이, 왜 이 아저씨들이 모든 영화에 출연하니까 한국영화를 재단하고 그러는데, 황정민씨 보고 자네는 어느 조합에서 왔나 하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제 옆에서 뭐 저기서 왔어요라고 하셨어요. 그때는 저도 추웠던 시절이기는 하지만 아니 주연배우를 모른단 말야, 의아했어요.

황정민 | 지금도 잘 몰라요. 출연작 중에서 최고로 많은 관객이 본 영화가 <바람난 가족>인데도 몰라요. <마지막 늑대> 끝나고 <천군> 할 때 결혼식했는데 TV매체들이 좀 왔었거든요. 그거 방송 나가고나서 더 많이 알아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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