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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전주국제영화제 가이드 [3] - 강추! 리스트 ②
박은영 김현정 김도훈 2005-04-26

나의 개 봉봉

사람 좋은 중년 남자 후안 ‘코코’는 이십년 동안 일했던 주유소가 팔리는 바람에 실직자가 된다. 그는 나무로 나이프 손잡이를 깎아 팔아보지만 신통치 않고, 직장을 구하려 해도 경기침체 때문에 자리가 없다. 막막한 심정을 헛웃음으로 감추는 코코. 그는 도로변에 고장난 차를 세워두고 있던 여자를 도와주었다가 죽은 그녀의 아버지가 남긴 도고 아르젠티노종 개 한 마리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의 삶이 변한다. <나의 개 봉봉>은 별다른 사건이 없는 영화다. 초라한 남자의 일상이 계속되다가 크고 하얀 개 한 마리가 나타나고 그 둘이 동무가 되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코코와 봉봉이라는 귀여운 이름을 가진 한 사람과 한 마리는 그들 나름대로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딱 한 가지가 부족했던 봉봉이 마침내 완벽한 개로 태어나는 순간, 코코의 조용한 환희는 잔물결처럼 공기를 흔들며 이상하도록 선명한 아르헨티나의 햇빛을 받아 반사광을 내뿜는다. 자신의 이름 그대로 출연한 후안 비제가는 출연작이 거의 없는 낯선 배우지만, 가엾은 중년 남자를 눈물을 삼키는 듯한 웃음으로 연기해냈다.

나쁜 피

함정에 걸려든 두 젊은이를 속도감 있게 뒤쫓는 영화. 카를로스와 페드로는 마약을 거래하러 나갔다가 상대방에게 돈을 강탈당한다. 그들의 보스는 난폭하기로 이름 높은 야오. 임신한 여자친구와 가정을 꾸리고 싶어하는 카를로스는 혼자 할머니를 보살피는 페드로와 함께 어떻게든 돈을 구하고자 훔친 돈으로 권총을 구한다. 그들은 토요일까지 야오에게 돈을 갖다주어야 하지만, 도시의 뒷골목은 예측불허 전쟁터다. 많은 청춘영화가 그렇듯 <나쁜 피>도 도둑맞은 500달러가 아니라 그 돈에 이르기까지 일어나는 온갖 사건들, 때이른 임신과 뒷골목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망과 꿈조차 꾸지 못하는 가난을 눈여겨보는 영화다. 그 때문에 남미의 청춘영화는 비참하다. 그들은 배반에 배반을 거듭해도 <트레인스포팅>처럼 넥타이 매는 일상 근처에도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 광고와 다큐멘터리로 단련된 감독답게 데뷔작임에도 탄탄하게 붙는 속도와 꾸밈없는 현실성이 돋보인다.

비전스 오브 유럽

EU에 소속돼 있는 25개국 감독들이 공동체가 되어가고 있는 유럽에 대한 개인적인 비전을 제시한다. 동일한 제작비와 5분의 상영시간, 화면비율 16:9. 세 가지 전제만을 지키면 되었던 스물다섯명의 감독들은 저마다 다른 스타일로 다른 비전을 펼쳐 보이고, 그 안에서 유럽의 미래를 가늠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지만, 거대한 변화의 면전에 던져진 감독들의 태도만은 충분히 흥미롭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천년 동안 수없는 민족과 국가가 차지했던 포르투갈 산악 마을을 찾아 어느 촌부의 기억을 더듬는다. 피터 그리너웨이는 그다운 방법으로 국기가 그려진 나체를 전시하면서 국가와 민족이 뒤섞여 있을 뿐만 아니라 경쟁하기도 해야 하는 유럽 공동체를 근심한다. 문화와 경제의 교류 혹은 충돌은 대부분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공통점. 몇몇은 유럽에서도 변방으로 밀쳐진 동구와 러시아, 유럽 부근 북아프리카 이민의 현실을 폭로하기도 한다.

추수기

“그날 이후 엄마는 더이상 미소짓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기법을 차용한 <추수기>는 소원이라곤 두 가지뿐이었던 소박한 여인이 영원히 미소를 잃어버리게 되는 서글픈 우화다. 1950년대 러시아의 시골 마을, 두 아이의 엄마인 안토니나는 마을에서 유일한 여성 수확기사로 일하고 있다. 그녀는 전쟁터에서 두 다리를 잃고 돌아온 남편을 지극히 사랑하고, 꽃무늬 캘리코천으로 옷을 지어 입는 꿈을 꾸곤 한다. 그러나 행복은 순식간에 무너진다. 최고의 수확량을 거두어 붉은 깃발을 수여받은 안토니나는 그 깃발에 집착하면서 점점 미쳐간다. <추수기>는 둘째아들이 옛날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영화다. 그 때문에 비극은 예정돼 있고, 돌이킬 수도 없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며 영화를 지켜보게 된다. 추수기를 맞은 황금색 들판과 이삭 위에 펼쳐진 맑고 푸른 하늘까지도 애달픈 정조를 띠게 되는 것이다. 매우 짧은 <추수기>는 돌처럼 굳어버린 여인의 표정과 다리없인 살아도 사랑없인 살 수 없었던 남자 때문에 68분 그 이상의 생명을 갖는 영화다.

내 마음의 구멍

올해 전주영화제에서 이보다 더 노골적인 변태 영화를 보기는 힘들 것이다. 작은 아파트에는 아버지 리카르드와 자폐적인 성격의 아들 에릭이 산다. 에릭은 검게 머리를 염색하고 록음악에 열중하는 고스족이고, 아버지는 친구인 게코와 함께 포르노를 만드는 인간 말종이다. 성기에 모종의 수술을 한 여배우 테스가 아파트에 오자, 세 사람은 섹스하고 마시고 마약하고 토하고 싸우며 하루를 보낸다. <내 마음의 구멍>은 내러티브라 할 만한 것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 카메라는 현실과 망상 사이를 오가는 듯 모호한 이미지들을 끊임없이 보여주고, 성기의 빈번한 노출과 실제 배뇨·구토장면이 관객을 고문한다. <내 마음의 구멍>이 쏟아내는 폭력적인 이미지를 견디기 위해서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화사한 레즈비언 청춘영화 <쇼 미 러브>를 만들었던 20살의 시인 루카스 무디손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이 디지털카메라의 극단적인 실험은 진정으로 새로운 것을 보고 싶은 관객에게만 열려 있다.

귀향

도쿄에 살고 있는 하루오는 “나 결혼해”라고 적힌 엄마의 편지를 받고 고향을 찾는다. 그곳에서 하루오는 8년 전 자신과 섹스를 한 다음날 아무 말도 없이 고향을 떠나버린 미유키를 만나고, 그녀와 또 한번 섹스를 한다. 이혼하고 딸 하나가 있다는 미유키. 하루오는 미유키의 집에 초대받지만, 설레는 마음도 무색하게, 그녀는 또다시 사라진 뒤다. 그와 눈이 똑 닮은 미유키의 딸 치하루의 손을 잡고 하루오는 하루종일 미유키를 찾아 헤맨다. <귀향>은 가볍고 단순하고 사랑스러운 영화다. 처음엔 치하루가 하루오의 딸일지도 모른다는 암시나 미유키의 증발이 궁금해지지만, 점차 의문은 사라지고, 아이 같은 남자와 외로운 여자아이의 발걸음만 따라가고 싶어진다. 대도시에 살면서도 때묻지 않은 하루오의 눈동자나 뒤늦게 사랑을 찾은 하루오 엄마의 천진한 애정이 마음을 끄는 영화. 하기우다 고지는 <수자쿠>를 연출한 가와세 나오미의 조감독 출신이다.

이노센스

한적한 숲속에 소녀들이 살고 있다. 서로 다른 나이대의 소녀들은 무리를 지어 생활하고 발레 레슨을 받는데, 그들을 둘러싼 담 너머의 세상으로 나가는 건 금지돼 있다. 갓 들어온 막내는 맏언니격인 비앙카가 밤마다 사라지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만, 그녀가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고 돌아오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이노센스>는 소녀의 성장(혹은 성장의 공포)에 관한 동화다. 성장이 이뤄지는 숲은 억압적이고 어떤 이유에선지 음울하다. 나무 관 속에서 나타나는 어린 소녀들은 이 숲속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일정한 나이가 되면(초경 무렵) 어디론가 떠나간다. 감독 뤼실 하지할릴러비치는 <아이 스탠드 얼론>의 제작과 편집을 맡는 등 가스파르 노에와 각별한 파트너십을 유지해왔고, 이 작품 또한 그에게 헌정했다. 오프닝에 뜨는 엔딩 크레딧이나 시종일관 흐르는 음산한 공기는 가스파르 노에의 영화와 닮은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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