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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컷]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 부엌
최보은 2005-05-06

<불량주부>보다 전복적인 <부모님 전상서>

나름,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간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다시 설거지통 앞이다. 나를 자생적 페미니스트로 만들었던 바로 그 공간,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 부엌으로 원위치한지 벌써 반년째다. 한평 남짓한 부엌에 하루 서너 시간 갇혀 있다보면, 꼭 바람 피우는 남편 없어도, 문학과 삶의 괴리에 대한 피 토할 고통 없어도, 가끔은 오븐 안에 머리를 밀어넣고 싶은 순간이 생긴다.

가령, 물 젖은 고무장갑이 잘 벗겨지지 않을 때, 냉장고에서 국물 많은 반찬그릇을 꺼내다가 떨어뜨려 바닥이 난장판됐을 때, 다듬고 씻고 무치느라 한 시간은 족히 허비했던 나물이 채 반도 먹지 않았는데 쉬어버렸을 때, 점심은 어찌어찌 해결했는데 저녁상엔 도대체 뭘 차려야 좋을지 아무런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을 때….뭘 먹어야 하지? 라는 고민을 시도때도 없이 하다보니, 어느 순간 밥 먹는 일이 두려워졌다. 하루 세끼 밥하고 반찬 만드는 일이 너무 징글징글해서, 밥에 대한 거부감이 생겨버린 거다. 이대로 가다간 다이어트 비디오 찍게 생겼는데, 사실은 정신적 영양실조가 초래한 육체적 기아상태에 다름 아닌 것이다. 주부우울증이 바닥을 친 며칠 전에는, 애들 학교 보내놓고 아침 아홉시 조금 넘어 식당에 갔다. 누가 차려주는 밥상이 그리워져서였다. 그리고 <캐스트 어웨이>의 톰 행크스처럼 뚝배기에 아작난 채 떠다니는 미꾸라지 시체를 향해 말을 걸기까지 했다.

내가 유난을 떠는 건가 싶어서, 어떤 진보 남자에게 “20년 직장생활보다 반년 주부노릇이 더 힘들다”고 털어놔봤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니가 특별한 경우일 거라는, 니가 집안일에 소질도 없고 적성도 없어서 그럴 거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런데 지난 주말, 드라마 <부모님전상서>를 보다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가 큰아들네는 처가로 보내고 글 쓰는 둘째 며느리는 자기 일하게 하자면서, “며느리 없는 셈 치면 안 될까?”라고 하자 엄마는 “평생 몸종으로 부려먹고도 부족하냐? 난 그렇게는 못 한다”며 드러눕는다. 그거다. 드라마 속의 엄마는 평생 직업 없이 아이 키우고 살림만 한 전형적인 현모양처인데도, 그는 그 화목한 집안 속에서의 자신이 ‘몸종이었다’고 정확하게 자각하고 있다. 그리곤, 니가 좋은 시아버지 노릇하자고 생색내는 데 내가 왜 피를 봐야 하느냐고 대든다. 주부 역할에 대해 아무 고민 없는 <불량주부>보다 훨씬 더 전복적이지 않은가? <불량주부>를 다룬 연예기사들이 “손창민, 주부 변신 성공” 따위 제목을 다는 걸 보라지. 주부의 역할은 밥하고 청소하고 애키우는 것이라는 고정관념 자체잖아. 여자와 남자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 주부의 역할에 대해서 ‘인간으로 태어나 이렇게 살다가긴 아깝지’라는 문제의식이 전혀 없잖아. 좋은 주부가 되기 위해서 요리학원을 다녀야 하고, 돈 버는 아내에게 주눅들고 혼나고 미안해해야 하고, 뭐가 다르냔 말이야. 지금 주부의 자리는, 여자가 서기에도 남자가 서기에도 비인간적인 ‘몸종’ 자리라는 얘길 해야 하는 것 아냐?

파출부 쓰면서 페미니즘 운동하는 것들이 세상에서 제일 꼴보기 싫다던 한 진보 글쟁이가 생각난다. 그가 뭐라고 떠들든, 조만간에 다시 도우미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나는 아마 정신병원에 들어가 있느라고 영영 페미니즘 운동 못하게 될 것 같다. 여자에게 부엌은, 맛있는 냄새가 나는 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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