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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연기, 작지만 무한한 가능성

특강 중인 박찬욱 감독

요즘 <씨네21> 창간 10주년 기념 특강이 진행 중이다. 지난주 배우 백윤식이 스타트를 끊었고 이번주에 배우 문소리와 박찬욱 감독이 강연자로 나섰다. 박찬욱 감독 특강 진행을 하면서 그에게 연기 연출의 비결을 물었더니 재미있는 답변이 나왔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예전에 <올드보이> 오디션을 할 때 강혜정이 왔는데, 문승욱 감독의 <나비>를 찍었잖아요. 그래서 그 감독과 일할 때 어땠냐고 질문을 했는데 너무나 인상적인 대답이 나왔어요. 문승욱 감독은 아실지 모르겠는데 굉장히 책도 많이 읽고 굉장히 지식인이에요. 한 장면의 연기를 설명할 때 10분, 20분을 굉장히 어려운 단어를 써서, 그리고 아주 복합적인, 도저히 동시에 하기 힘들 것 같은, 자기로선 도저히 자신이 없는,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하고 뭐 그런 거 있잖아요. 그런 것을 10분 동안 설명해주신대요. 그러면 자기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대요. 그래서 그때 같이 연기했던 사람이 김호정씨잖아요. 호정 언니한테 가서 감독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시는데 이거 어떻게 하라는 소리야, 언니, 그러면 ‘아, 별거 없어. 그냥 울라는 소리야. 그냥 울어’ 그런대요. 그래서 그냥 울면 문승욱 감독이 ‘아, 잘했다’고 그런대요.”

박찬욱 감독은 이런 일이 문승욱 감독의 현장만 아니라 대부분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말했다. 장준환 감독과 일한 신하균도 강혜정의 경험에 공감했다고 한다. 장준환 감독이 까다롭고 복잡한 주문을 하면 신하균도 선뜻 네, 하고는 자기 생각대로 한다는 것이다. 박찬욱 감독은 배우는 그런 존재이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배우에게 올바른 연기를 끌어낸다는 것은 대체 어떻게 가능해지는 것일까? 박찬욱 감독의 답변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감독이 할 수 있는 일은 연기를 시켜보고 그건 아니라고 말하는 정도겠죠.”

그건 아니라고 말할 자유, 연출자가 배우에게 할 수 있는 게 고작 그것밖에 없다는 건, 안타깝지만 수긍할 만한 말이다. 제대로 된 연기가 나올 때까지 수십번 같은 장면을 되풀이해 찍는 감독이 많은 것도 이런 한계 때문일 것이다. 오죽하면 히치콕은 연기가 마음에 안 들면 찢어버릴 수 있어 좋겠다며 월트 디즈니를 부러워했을까. 영화는 이처럼 비효율적이고 낭비가 심한 매체다. 하지만 거꾸로 그렇기 때문에 논리로 해명할 수 없는 치명적 매력을 가진 매체이기도 하다. 이번 특강에서 배우 문소리가 한 말은 감독이 연기를 지도할 때 느끼는 한계에 화답하는 표현 같다. “이창동 감독님이 문고리만 잡으면 된다고 하신 적이 있어요. 처음부터 문을 열어서 여기 내 방이네 하고 들어가는 것보다 지켜보고 만져보고 상상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문고리가 잡히는 순간에는 몸이 짜릿하고 너무 재밌죠. 근데 어떤 캐릭터는 문고리가 없고, 어떤 건 이상한 문고리가 달렸고 그래요.”

아주 좁은 틈, 아주 작은 가능성에서 무궁무진한 풍요로움이 생긴다는 사실이 나는 아직도 신기하다. 아마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씨네21>은 번번이 감독과 배우를 만나서 창조의 신비를 파헤치려 들지만 그걸 어찌 다 알겠는가. 어쩌면 창조의 비밀을 캐는 일은 파면 팔수록 새로운, 결코 이룰 수 없는 목표라서 우리를 매혹시키는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