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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유능한 전문직여성답게!
2000-03-28

심은하

심은하 같은 배우는 멀찍이 바라만 보아도 즐겁다. 며칠 전 <인터뷰> 시사회장은 그가 무대 앞에 나와서있기만 해도 객석이 고요히 숨죽였다. 스타의 힘이란 그런 것이다. 하지만 시사회장의 여배우들에게서 늘 “열심히 했어요. 잘 봐주세요” 또는 “예쁘게 봐주세요” 식의 똑같은 인사말을 들을 때, 나는 궁금해지곤 한다. 작품 발표를 앞둔 사람으로서 짐짓 겸손하려 하는 걸까, 작품에 대해 실제로 아무런 의견이 없는 걸까.

<8월의 크리스마스>의 심은하나 <내 마음의 풍금>의 전도연은 각기 자신의 배역을 정확히 이해하고 표현하는 연기를 했다. 그들은 모두 ‘유능한 전문직 여성’들이다. 그들의 경쟁력이 오직 예쁜 얼굴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연기란 대단히 지적인 노동이다. 대본을 외우려면 타고난 기억력이 요구되고, 배역을 이해하려면 분석적인 사유능력이 필요하며, 성격을 표현하려면 풍부한 감수성이 받쳐줘야 한다. 배우는 배역의 인생에 푹 빠져야하며 자기 경험 속에서 그와 유사한 상황과 감정을 찾아내야 한다는 스타니슬라프스키의 메소드 연기론이 막 할리우드 배우들에게 도입되던 1950년대에, 배우들이 자기 감정에 몰두하느라 대사를 까먹거나 더듬거리기 일쑤여서 메소드 연기론 자체를 문제삼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영화화면 속에서 그걸 감쪽같이 해내는 배우들을 보면 “천재구나”싶다. 부와 명성을 한꺼번에 움켜쥘 수 있는, 그래서 경쟁이 무지 치열한 그같은 전문직에서 몇손가락에 꼽을 스타가 된다는 건, 대단한 재능이다.

지난해 스크린쿼터 시위 때 통신에서 여배우들이 자신들은 외제차와 외제화장품 쓰면서 ‘애국’시위한다고 비판하는 글을 읽은 적 있다. 물론 그들 중에 외제차 타는 이가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왜 하필 여배우인가라는 생각에 씁쓸했었다. 인기 여배우들이 ‘성공한 전문직 여성’이 아니라 사치와 허영의 화신으로만 비친다면 문제다. 여러 해 전 김지미씨가 심장 전문의와 결혼한다는 한 중앙일간지 기사에서 ‘연예인의 지위가 많이 높아졌다는 증거’라는 식으로 논평해 실소한 적 있다. 요즘 행적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이 있지만, 한국영화사에서 드물게 오랜 생명력을 유지한 대배우이고 영화제작과 수입에 뛰어들었던 여걸에 대한 평가절하치고도 너무 심했던 것이다. 그런데 시사회장이나 대종상시상식 같은 데서 젊은 스타급 여배우들이 패기만만한 전문직 여성이라기보다 마치 유리상자처럼 부서지기 쉬운 어떤 것으로 비칠 때, 여배우들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편견에 그들 스스로 일조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