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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진 러브스토리에도 희열은 있다, <외출> 촬영현장
사진 오계옥김혜리 2005-06-07

배용준·손예진 주연의 <외출> 삼척 촬영현장을 가다

초록이 눈을 찌른다. <외출> 촬영현장으로 향하는 길 산자락에 눈꽃이 피어 있던 것이 고작 두달 전이라니 거짓말 같다. 자신들을 배신하고 몰래 사랑한 배우자들의 교통사고로 인해 고통 속에 마주친 <외출>의 남자 인수(배용준)와 여자 서영(손예진)은 3월 그날의 죽서루에서 처음 친밀감을 나누었더랬다. 지금쯤 두 사람도 서로에게 부쩍 다가섰으리라. 오후 1시. 삼척해수욕장에 도착하니 촬영 기재들보다 일본에서 온 욘사마 팬들이 먼저 여기가 촬영현장임을 알린다. 해변을 면한 가게 2층 테라스에 늘어선 한떼의 망원경이 우르르 움직이는 품새가 흡사 철새 도래지의 버드워칭(bird-watching) 풍경이다.

오늘은 서영과 인수가 조심스럽게 데이트를 한다. 몇달 전 허진호 감독은 이런 그늘진 러브스토리에도 천진난만한 연애의 희열이 빛나는 장면이 있을까라는 물음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답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인가보다. 해변과 나란하게 깔린 카메라 트랙이 두 사람이 걸어갈 길을 넌지시 가리킨다. 지난번 집에 다녀온 게 보름 전이라는 스탭들은 방문객의 눈엔 삼척 주민이 다 된 듯하다. 유난히 평온한 얼굴의 이병하 동시녹음기사는 전작 <꽃피는 봄이 오면>도 인근 도계에서 작업한 터라, 해남 촬영을 갔다 삼척에 돌아오려니 귀갓길 같더라며 웃는다.

바닷가 촬영분의 극중 시간은 해질녘. 천막을 쳐도 소용없는 땡볕이 문제다. 흐린 날씨였다면 늦은 오후인 척해도 통했을 테지만, 오늘의 하늘은 눈속임이 가능할 성싶지 않다. 이윽고 한 스탭이 목청 높여 알린다. “카페로 옮긴데요. 그것밖에 몰라요!” 놀란 기색도 없이 척척 이동이 이뤄진다. 허진호 감독은 <외출>에서도 현장의 공기와 그것을 호흡하는 배우 안에 움트는 감정이 영화를 흔들도록 부추기고 있다. 이번엔 큰맘먹고 콘티를 그렸지만 구속력은 없다. 대사마저 정해진 것이 없다. “이튿날 촬영분을 연출부가 배우 역할을 대신해서 이모개 촬영감독이 미리 비디오로 찍어본다. 이렇게 인물이 들어가면 시나리오가 한번 달라지고 그 다음날 진짜 배우가 구도 안에 들어서면 한번 더 바뀐다”는 것이 강봉래 PD의 설명이다.

해변 카페 창가에 자리를 잡은 배용준과 손예진, 허진호 감독은 두런두런 대사와 움직임을 상의한다. 바깥이 환해, 모니터에 잡힌 그들은 마치 실루엣애니메이션 같다. 멀리서는 연출부의 지휘에 따라 단역배우들이 열심히 창 밖 풍경을 연기하고 있다. “하나, 둘, 셋!” 사인이 떨어지자 인수가 무겁게 입을 뗀다. “우리, 뭐 할까요?” 서영이 받는다. “뭐, 하고 싶으세요?” 불쑥 일어선 인수는 한 호흡 멈추었다가 서영의 옆자리로 불쑥 옮겨 앉는다. 여자는 테이블 저편에 주인을 잃고 덩그러니 남겨진 커피잔을 들어 남자 앞에 옮기는 동작으로 허락을 대신한다. 키 큰 배용준이 일어날 때 카메라가 덩달아 고개를 들까 말까 이모개 촬영감독이 궁리한다. 숏 사이즈를 고민하던 허진호 감독은 앞서 찍은 극장신을 현장 편집자와 돌려보며 연결의 리듬을 시험한다. 테이크가 끝날 때마다 감독과 배용준, PD가 피워 문 담배연기로 모니터 앞은 자욱하다. 손예진은 부채질로 가만히 연기를 걷어낸다(결국 제작부장의 금연령이 떨어졌다). “데이트하는 보통 커플의 ‘뭐 할까요’하고는 아주 다르겠지.” 허진호 감독의 나직한 코멘트다. 뭔가 석연치 않은 듯 골똘하던 배용준이 짧게 감상을 밝힌다. “너무 무겁다.”

일곱번의 테이크 끝에 촬영팀은 다시 해변으로 돌아갔다. 촬영 순서를 따라 인수와 서영의 데이트 코스도 순서가 바뀌었다. 열린 공간에 나온 인수와 서영은 한결 자유로워 보인다. 웃음 속에 경기 같은 멈칫거림이 없다. 카메라폰으로 둘의 사진을 찍는 배용준과 손예진의 모습이 무슨 모델처럼 환해 저래도 괜찮을까 갸웃거리다 문득 깨닫는다. 서영과 인수는 원래 저런 사람이었구나. 아내와 남편의 벽력같은 배신 전에는 흉터를 만든 적이 없었던 둥글고 온전한 남자와 여자였구나. “비밀과 공감대가 그들을 이어주는 고리는 아니다. 둘은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더욱 많이 잘 사랑했을 사람들이다”라던 감독의 말이 새삼스럽다. 석양과 촬영부의 초조한 눈싸움이 끝난 것은 저녁 8시. 내일은 어떤 신을 찍는지 여럿에게 물어봤지만 아는 이가 없다. 숙소로 돌아가 다시 만난 허진호 감독에게 물었다. 지금의 <외출>이 크랭크인 인터뷰에서 내게 그려보여준 영화와 같은 영화냐고. 허진호 감독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영화예요.” <외출>은 그렇게 쉼없이 흔들리면서 예정된 뱃길로 가고 있다. 아니, 모르겠다. 흔들리고 출렁거려야만 마음먹은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영화인지도.

<외출>과 삼척

삼척은 지금, 욘사마 전성시대

배용준과 손예진의 ‘외출’로 작고 조용한 도시 삼척은 술렁이고 있다. <겨울연가>가 춘천에 불러온 관광 물결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강원도와 삼척시는 삼척의료원의 로케이션 협조를 위해 총 1억5천만원을 지원한 것을 비롯해 경찰서, 해수욕장 등 공공장소 촬영을 후원했고 병원 인근의 공사일정까지 연기했다. 삼척고속버스터미널에서는 <외출>의 스틸 사진이 외지인을 맞이하게 된 것은 꽤 오래된 일. 배용준과 손예진의 숙소인 팰리스호텔 로비의 기둥은 두 배우의 대형 배너로 장식됐고 프론트 옆 메모판은 간혹 놀라운 한국어 맞춤법과 문법을 자랑하는 일본과 동남아 팬들의 정성어린 메시지로 빼곡하다. 호텔 매점 아주머니도 어느새 욘사마 팬들과 돈독한 친분을 쌓았다. 삼척의 택시기사들에게 유창한 한국어로 배용준의 차를 뒤따라가달라고 부탁하는 일본 관광객은 낯설지 않은 손님. 1시간당 요금 정가까지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소문이다.

<외출> 바람을 촉감할 수 있는 곳은 주요 촬영지인 삼척의료원, 삼흥모텔, 죽서루, 카페가 줄지어 서 있는 거리. 욘사마 팬들의 아지트로 자리매김하려는 심산으로 <겨울연가>를 상시 상영하는 카페가 있는가 하면, 망원경과 기념품을 파는 노점도 생겨났다. <외출> 촬영팀이 즐겨 찾았던 손맛 좋은 식당에는 한때 ‘욘사마 정식’, ‘욘사마 대구탕 세트’가 메뉴에 오르기도 했으나 지나친 상업화를 우려한 영화사의 청으로 지금은 사라졌다. 조용한 죽서루 경내에 간혹 드라마 음악이 흐르게 된 것은 반갑지 않은 변화. 뉴욕에 모처럼 갔는데 가는 곳마다 우디 앨런 영화의 사운드트랙만 흐른다면 얼마나 지루한 노릇일까. 또 다른 촬영장소인 80년대풍의 카페 ‘자전거 도둑’에는 관광객과 팬들의 사진으로 만든 앨범이 비치돼 있다. 헌팅에서 비롯된 인연으로 ‘자전거 도둑’ 주인장의 아들은 지금 <외출>의 제작부로 일하고 있다. 주의사항 하나. 이 거리에 자리한 소망약국은 촬영을 위해 만들어진 세트로 약을 팔지 않는다. 촬영지인 모텔에 미술팀이 만들어 붙인 단란주점과 목욕탕 간판 때문에 골탕 먹는 삼척 시민도 간간이 있다고. 촬영이 끝나면 관광 특수가 끝나지 않겠냐는 우려도 시민들 사이에서는 떠돌고 있지만 <외출> 효과의 수명은 9월9일 아시아 동시 개봉 결과가 나와야 제대로 측정할 수 있을 듯하다. 제작사 블루스톰의 마케팅팀은 패키지 상품을 운영하는 여행사들의 촬영일정 문의에 줄곧 시달리고 있지만, 임박해서야 스케줄과 장소가 결정되는 현장 특성상 알려주고 싶어도 알려주지 못하는 처지다.

배용준 인터뷰

“어쩔 수 없이 힘겨운 순간이 있다”

<외출> 현장에서 만난 배용준은 언제 물잔을 놓을까 하는 연기 타이밍부터 숏의 길이, 현장 분위기까지 너무 많은 것에 대한 생각을 담배연기로 연소시키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상대와 씨름하는 눈치인데 이제는 자기를 둘러싼 군중의 눈에 시선을 이입하는 데 익숙해진 듯 간간이 짐짓 밝은 표정을 짓는다. 배용준은 <외출> 개봉 뒤 10월부터 <태왕사신기>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다.

-<외출> 때문에 삼척에서 거의 살다시피하고 있는데, 도시 느낌이 어떤가.

=세트 같다. 그래서 편하다. 내가 일하는 게 제일 좋고 편한 사람이라 그런가보다. 서울에 가면 오히려 불편하다.

-<외출>이 당신에게 무엇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선택했나.

=시나리오도 없이 트리트먼트 정도만 봤는데 오직 감독님을 보고 선택했다. 가장 큰 동기는 새로운 작업방식을 배우려는 거였다. 내가 배우로서 계속 나아가려면 뭔가를 깨야 하는데 그것을 허 감독님 영화가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 모두 다작이 아니니까 지금 아니면 안 된다 싶기도 했다.

-투철하게 준비하는 당신의 방식과 현장에서 많은 것을 선택하는 허진호 감독의 방식이 충돌하면서 서로 변할 거라고 예측했는데.

=감독님은 안 변하고 나만 변했다. (웃음) 준비하려는 나 자신을 억누르려는 것이 가장 힘든 준비다. 처음에는 정말 마음고생이 심했다. 이제는 적응이 될 만한데 촬영이 끝나간다. 한편 더 하면 완전히 적응이 될까?

-허진호 감독의 연출 스타일은 알고 있었나.

=익히 들었다. 감독님이 처음에 “시나리오 같이 쓰자”고 해서 무슨 말인가 했는데, 이런 뜻이었던 거다. (웃음)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때도 다 준비한 게 아니라 모니터를 보며 내게 몰랐던 표정을 발견하고 놀라는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외출>은 아예 다 비워두고 있다. 안 그러면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오직 찍는 장면의 앞 상황, 뒤 상황만 갖고 몰입한다.

-<스캔들…> 현장에서는 직접 사진도 많이 찍었는데.

=이번에는 많이 못 찍었다. 디지털카메라로 바꾼 뒤 내가 너무 막 찍는 것도 같고.

-허진호 감독의 영화에는 한국영화 남성 캐릭터로서는 드물게 현실에서도 곁에 두고 싶은 남자들이 나오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그런가? 나는 감독님께 전작의 남자들이 너무 비겁하지 않냐고 따지기도 했는데. (웃음) 내게는 비겁하게 느껴졌다.

-달리 말하면 가학적이거나 피학적이지 않다는 뜻 아닐까.

=<외출>의 인수는 지금까지의 허진호 감독의 남자들과 많이 다를 것 같다. 강하고 쿨하고 엉뚱한 구석이 있는.

-한류 열풍으로 배우라기보다 공인의 자리에 묶여버렸다. 큰 파워도 얻었지만 예인다운 자유로움을 빼앗겼는데.

=어느 날 현장에서 연기의 답을 찾을 수 없어서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피우러 나간 적이 있었다. 그 때 바깥에서 기다리던 한 무리의 팬들이 그런 나에게 일제히 박수를 보냈라. 순간 울컥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그리고는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했다. 고맙고 힘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힘겨운 순간이 있다.

손예진 인터뷰

“이번엔 별로 안 울 줄 알았는데 많이 울었다”

손예진이 캐스팅되고 나서 <외출>의 서영은 주부로 직업이 바뀌었다. 교복 차림도 어색하지 않은 그녀인데 어째서일까? 산전수전 겪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결핍이 없어서 타인에게도 너그러울 수 있는 어른스러움이 그녀에겐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위안은 필요한 법. 보고 싶다는 주인의 부름에 서울서 급파된 강아지 찌루는 현장 가장자리에서 그녀를 말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외출>의 끝이 보이지만 손예진의 휴식은 멀다. 그녀를 기다려온 영화 <작업의 정석>이 6월 말로 크랭크인 날을 받아두었기 때문이다.

-처음 허진호 감독을 만났을 때 무엇을 묻고 답했나.

=서로의 전작들과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얘기했다. 감독님의 경험담도 어디 가서 말하지 말라는 단서를 달아서 들려주셨다. (웃음) 찍다보니 역시 영화에 감독님 경험이 많이 반영되는 것 같다.

-멜로드라마 영화를 많이 찍어왔는데 허진호 감독의 사랑영화는 어떻게 다르다고 봤나.

=살아 있는 사랑이랄까. 연애가 전개되는 동안 등장하는 예기치 않은 유머도 재밌었다.

-영화를 전체로서 보는 눈이 있다는 허 감독의 평이 있었다. <외출>을 전체적으로 어떤 영화라고 봤나.

=처음에는 매우 강렬하고 끈끈한 사랑영화라고 봤는데 찍어가면서 내 캐릭터도 인수도 자꾸 달라진다. 절제된 면도 많고 생각지 못한 곳에서 생각지 못한 감정도 표출된다. 나도 궁금하다.

-<외출>에서 배우로서 무엇을 구하고 있나.

=지금까지는 스토리를 따라가고 주어진 역할을 완성하는 연기를 해왔다. <외출>을 통해 만들어지지 않은 연기를 하고 싶었다.

-어두운 상황인데 인수와 함께 있는 장면이 생각보다 밝았다.

=이 사랑의 극단적 설정에 대해 연기할 때는 닫아두는 게 많다. 그런 상황이라고 해서 어둡게만 연기해야 하는 게 아니라고, 어떤 때는 아예 잊어버리라고 감독님이 강조하신다.

-술 마시는 신은 술 마시고 연기했나? 그렇게 현장에서 만들어진 대사가 있다면.

=맥주 한잔 정도. 나도 모르게 슬퍼져서 인수가 왜 그렇게 일찍 결혼했냐고 물었을 때 문득 “아빠가 시집가라 그래서…”라는 대사가 튀어나왔다. (웃음)

-이번 영화에서도 많이 울었나.

=이번엔 별로 안 울 줄 알았는데 많이 울었다. 울음이라는 것이 슬플 때만 나오는 게 아니라 분해서도 억울해서도 나오는 거라 초반에 눈물신이 많았다. 멜로드라마 장르 영화만 계속 하다보니, 작은 영역에서 새로움을 찾는 것이 어려운 작업임을 알겠다.

-촬영 중간에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정사>와 마이크 니콜스의 <클로저>를 보았다고 들었다.

=<정사>는 보면서 너무나 가슴이 답답하고 우울했다. <클로저>는 주변에서 참고하라고 권해서 봤다. 재밌었고 우리가 사랑하는 현실의 모습도 들어 있었다. <클로저>는 제3자적 거리를 두고 사랑을 보는 반면, <외출>은 공감과 이해를 통해 관객을 좀더 주인공의 체험에 끌어당기는 영화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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