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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 여덟자의 기술, 외화번역 강민하
사진 정진환이영진 2000-03-21

1976년 생·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우나기> <러브레터> <소나티네> <사무라이 픽션> 번역

<러브레터>를 보고 나온 관객이 “오겐끼 데쓰까”를 입에 물고 나오는 것을 보고 강민하(25)씨는 다행이라 여겼다. 기억과 소통하려는 <러브레터>의 반복적인 서두, 오겐끼 데쓰까의 울림과 여운이 담기는 장면을 두고 무척이나 고심했기 때문이다. 영화번역을 하는 강민하씨는 “영상과 사운드의 교감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서 일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라고 말한다. 의미에 충실하다가 자칫 이미지를 해치는 우를 범할 수도 있기 때문. ‘오겐끼 데쓰까’의 경우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두고 싶을 정도였다. 결국 “잘 지내십니까”로 올려놓았지만 내내 조마조마했던 것도 사실.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표현까지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영화번역은 지켜야 할 수칙이 많다. 대표적인 게 글자 수다. 한줄에 8자씩, 세줄 이상 자막을 넣을 경우 관객의 집중력을 흐트려놓는다. 따라서 핵심적인 표현만을 깔끔하게 추려내는 것이 중요하다. 긴 이름의 경우 혼동스럽지 않게 제시해야 한다. “일본어의 경우는 신조어가 많아요. 자칫하다간 중요한 의미를 놓칠 수도 있죠. 현지에서 작업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사소한 뉴스까지도 챙겨 읽을 필요가 있어요. 그래야 흐름을 놓치지 않죠.” 강민하씨의 작업은 일본어 대본과 함께 받은 비디오 테이프를 몇번이고 반복해서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물론 그전에 작업할 영화에 대한 사전 자료는 철저하게 조사해 놓는다. 어떤 호흡으로 잘라서 번역해야 할지 감이 올 때까지 계속 보고 나서야 군더더기 없는 8자를 염두에 두고 번역작업에 들어간다. 그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단어들은 특히 고심한다. <러브레터>나 곧 개봉할 <쌍생아>의 1인2역 캐릭터들의 경우에는 미묘한 차이를 줘야 하지만 어미를 길게 굴릴 수 없다는 점에서 쉽지 않다. 이후 1차 시사 프린트를 확인할 때는 오역과 오자는 없는지, 자막이 제때 들어가는지를 체크한다. 비디오 화면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운 글씨나 사운드도 이때 잡아내야 한다. 관객의 시선을 뺏지 않으면서도 의미와 느낌을 전달해 주어야 좋은 번역이라는 강민하씨에게 적당한 작업시간은 1작품당 1주일이다.

“제가 들어오니까 일본영화도 따라오더라구요.” 도쿄의 쓰다주쿠대학에서 1년간 교환학생으로 수학했던 강민하씨는 97년 돌아오자마자 필름컬쳐영화제 상영작인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큐어> 번역 일을 맡았다. 이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번역과 통역일로 불려다니면서 쓰카모토 신야나 이와이 순지와는 친한 사이가 됐다. “일 때문에 만났지만 이야기를 전해주다 보면 친밀감이 생기죠. 얼마 전에 <4월이야기> <언두> <피크닉> 모두 번역했다고 했더니 이와이 순지 감독이 많이 컸다고 하더라구요.” 짧은 경력에 비해 최근 개봉한 일본영화 대부분이 강민하씨를 거쳤다. “원칙이나 기준없이 작업하다 보면 끌려가기 쉬워요.” 관객 수를 생각해서 유행어를 넣으라는 식의 영화사쪽 요구들은 거절한다. “남의 충고를 무시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요구하는 것은 번역 역시 창작 과정을 통한 엄연한 저작물이라는 거죠.” 요즘 한·일합작으로 제작중인 애니메이션 <연씨별곡>에 라인 프로듀서까지 맡아 한층 분주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