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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 많은 성기가 말 많은 생각을 훈화하는 코믹애정극, <권태>

표정 많은 성기가 말 많은 생각을 훈화하는 코믹애정극.

세드릭 칸이 3년의 시간차를 두고 만든 <권태>와 <로베르토 수코>는 아무래도 통하는 구석이 있다. 양친살해를 시작으로 무심한 듯 연쇄살인을 이어가는 실존인물 ‘로베르토 수코’에 대해 감독은 동정도 하지 않지만 비난도 하지 않는다. 범죄로 범죄적 세상에 맞선다고 항변하는 그의 행위와 표정을 처연하게 비출 뿐이다. <권태>에선 성기로 권태스런 세상을 맞받아치는 17살의 소녀 세실리아를 그저 바라본다. 말은 40대 철학교수 마르땅을 통해 철철 흘러넘친다. 세실리아에게 포섭돼 ‘계몽’받기에 이르는 그는 자신의 전 부인에게 “섹스를 통해서만 자신을 표현해… 입보다 성기의 표정이 더 풍부해”라고 소녀를 묘사한다. 살인하는 수코나 섹스하는 세실리아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으로 묘사되지 않는다(사실 ‘생각’을 보여주기란 힘든 노릇이다). 하지만 이들은 생각하는 상대방이나 관객을 압도한다. 생각없는 세실리아는 생각 많은 철학자 마르땅을 완벽히 압도한다. 원작소설에서 화가였던 그를 철학자로 바꿔놓은 대목은 명백히 의도적이다.

애초부터 마르땅은 몸으로 생각하는 탐험을 갈망했던 것 같다. 그는 비좁아 보이는 파리 시내를 구형의 BMW로 겁없이 질주하길 반복한다. 마음이 달아오를 때면 거리의 사창가를 향해, 전 아내와 세실리아의 집을 향해 불쑥불쑥 질주하곤 한다. 세실리아를 만나게 된 것도 차를 몰며 해소할 뭔가를 찾아헤맬 때다. 할아버지와 손녀처럼 보이는 노화가와 세실리아 사이의 끈끈함을 본 그는 그들의 주위를 맴돈다. 노화가가 세실리아의 성기 위에서 죽은 뒤 마르땅은 노화가를 질투하며 소녀에게 젖어든다.

마르땅은 소녀의 대화법을 오해했다. 성기의 풍부한 표정만큼 입에서도 말이 풍성하게 쏟아져나오길 기대하지만 소녀는 단도처럼 단문으로 대화를 잘라나간다. 그나마 마르땅이 싫어할 말은 감추어버린다(그렇지 않고 툭 진심을 내뱉으면 마르땅은 광기어린 소년으로 돌변하곤 한다. 폭력으로 되갚기도 한다). 말이 많지 않은 입은 생각이 많지 않은 머리로 오해된다. 우리는 이런 전 과정을 빤히 쳐다보게 되니 웃지 않을 도리가 없다.

마르땅이 철학자답게 좀 덜 모순적이고, 세실리아가 맑은 눈만큼 좀 덜 뻔뻔스럽고, 끝난 뒤 공격적으로 한번 더 벌어지곤 하는 섹스가 좀더 따뜻했으면 하는 바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반듯반듯한 모양새를 사양하는 게 세드릭 칸의 원칙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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