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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10주기 맞는 SF 작가 로저 젤라즈니를 추모한다
김현정 김도훈 2005-06-17

우주의 발명가, 시간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소설 <밑줄 긋는 남자>에서 콩스탕스가 도서관에 가는 이유는 이미 죽은 로맹 가리(혹은 필명인 에밀 아자르)가 더이상 책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좋아하는 로맹 가리 대신 다른 작가를 찾아야만 한다. 예술가의 죽음을 한탄하는 이유는 대부분 비슷할 것이다. 그 작가의 새로운 소설을 보지 못하므로, 그 감독의 새로운 영화를 보지 못하므로. 10년 전 6월14일에 죽은 로저 젤라즈니도 그런 작가 중 한명이다. <앰버 연대기> <신들의 사회> <내 이름은 콘래드>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등을 썼던 그는 SF문학을 신화의 경지로 이끌었고 동시에 신화를 해석가능한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젤라즈니는 영화와는 연이 없었다. 필립 K. 딕과 다르게 로저 젤라즈니는 단 한편의 극영화와 <트와일라잇 존>의 에피소드 한편으로 각색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로저 젤라즈니의 10주기를 기념하는 것은 영화잡지의 협소한 지면이 허락하지 않았던 그의 작품을 소개하고자 하는 핑계일지도 모른다. 다행스러운 점은 있다. 영화와의 시너지가 없어 한국 대중에게 비교적 낯설었던 로저 젤라즈니는 그동안 번역된 책이 많지 않기 때문에 아직도 읽을 수 있는 책이 많이 남아 있다.

“쥐어짜듯이 생명으로부터 모든 것을 끌어내고, 유유자적하게 그걸 즐기는 걸 보면 인간이 알고 있을 리가 없는 시간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당신은 누구죠?”

-로저 젤라즈니의 단편 <화이올리를 사랑한 남자> 중에서

로저 젤라즈니

로저 젤라즈니는 무한의 시간을 품고 있던 작가였다. 행성과 항성 사이를 여행해야만 하는 SF 작가라면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경계 너머를 바라보았겠지만, 젤라즈니는 감히 태초의 순간을 사색하곤 했다. 새로운 종족의 기원, 방황하는 유대인만이 알았을 불사(不死)의 피로, 눈앞에서 한 세계가 솟아오르는 경이. 젤라즈니는 <신들의 사회> <내 이름은 콘래드>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와 같은 소설들에 그러한 신화를 녹여넣었고 정밀한 화학작용을 거쳐 지금껏 들은 적이 없는 또 하나의 신화로 만들었다. 그러나 문자만으로 거대한 시간과 공간을 창조했던 그 자신은 꼭 10년 전인 1995년 6월14일 산타페의 성 빈센트 병원에서 고작 58살에 죽었다. 암이었다. 그가 아꼈던 후배이자 <얼음과 불의 노래>의 작가인 조지 R. R. 마틴은 “젤라즈니는 동세대 가장 뛰어난 SF 작가였다. 그는 SF의 영역 전체를 변화시켰다”는 간결한 문장으로 조의를 표했다.

신화, SF, 판타지로 이뤄진 뫼비우스의 띠

아메리칸 뉴웨이브의 일원이었던 젤라즈니는 언어나 기호, 심리학을 SF와 교배했던 동료들과 다르게 신화를 씨앗으로 선택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의 하나인 <신들의 사회>는 힌두 신화와 불교를 기둥으로 세우고, 고도의 기술문명으로 그 사이를 메워, 신화를 세속의 경지로 끌어내린 소설이었다. 그러나 영혼을 파장의 형태로 변형할 줄 아는, 신(神)이라 자칭하지만 기술을 독점한 인간일 뿐인 존재들은, 어쩔 수 없는 천상의 지배자들이기도 하다. 신화와 기술과 판타지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원을 그리는 세계. SF와 판타지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 곤란해하곤 했던 젤라즈니는 이처럼 서로 다르다고 믿은 영역들을 배척하지 않으면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만의 소설을 창조했다. 미지의 행성에 착륙한 지질학자처럼 비교적 어린 장르인 SF를 두고 실험에 몰두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문학에 매혹된 이유 중 하나로 텍스트 안에서의 실험이 가능하다는 점을 든 적이 있다.

젤라즈니는 여섯살 때부터 SF에서 하드보일드 누아르에 이르는 대중소설을 탐식했고, 보수적인 신화학자들은 이야기꾼으로 취급하기도 하는 조셉 캠벨과 제임스 프레이저의 저작을 파고들었다(<내 이름은 콘래드>에는 사람 고기를 먹는 부족이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를 인용하는 다소 코믹한 대목이 등장한다). 그에겐 책장이 우주였던 셈이다. 그리고 그는 언어의 형식미에 매혹되기도 했다. 열여섯살에 처음으로 단편소설을 돈을 받고 팔았던 젤라즈니는 대학 다니면서도 계속 소설을 썼지만 산문보다는 시를 쓰고 싶어했다. “시인으로 먹고살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소설을 쓰기로 했는데, 시험삼아 해봤더니, SF소설은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1962년 <어메이징 스토리즈>의 편집자 셀레 골드스미스에게 발탁된 젤라즈니는 다음해 <판타지&사이언스 픽션>에 중편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를 실으면서 놀라운 신인작가로 떠오르게 되었다.

자전성이 짙은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는 타고난 언어감각과 시적 재능으로 화성인의 내밀한 신전 부근까지 이르게 되는 지구인 갤린저가 주인공이다. 이 소설은 화성으로 간 대부분의 SF와 달리 호전성이나 개척정신이 없다. 그 대신 소멸 위기에 처한 한 종족의 비밀이 조금씩 드러나고, 오랜 기다림 끝에 실현되는 예언이 있고, 최초의 아이를 잉태한 아담과 이브로 남을 남녀의 결합이 이루어진다. 60년대에 강한 충격파를 던졌던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는 단어마다 빛이 나고 상상으로 역사책을 쓰고 상징과 인용이 넘쳐난다는 점에서 젤라즈니의 전성기를 압축해서 예고하고 있다. 또한 매우 고풍스럽다. 분자를 배열해 장미를 꽃피울 수 있는 미래가 배경인데도 백인들이 신대륙을 탐험했던 과거로부터 울려온 듯하다. “나는 동료들의 SF소설보다는 실용서적과 논픽션, 과학서적을 읽고 무엇보다 역사책을 읽는다. 미래가 어떨지 상상하기 위해선 과거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젤라즈니는 창공보단 대지에 가까운 작가인 것이다. 그의 소설 속에서 수천년을 살아남은 힌두 신화의 신들은 대지에 결집해 피바람을 부르고 늙지도 죽지도 않는 콘래드는 걸어서 그리스를 가로지른다.

“내가 틀린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정도는 알아야 하므로” 친숙한 신화와 SF를 택한 젤라즈니는 초자연적으로 들리는 신화가 결국은 경험의 집합이라는 사실을 꿰뚫고 있다. 그리고 신화 형성의 과정을 거꾸로 올라가기도 한다. 그의 작품으로는 드물게 영화화 논의가 있었던 <12월의 열쇠>는 물리적인 인간의 흔적이 신의 경지로 격상되는 흥미로운 과정을 보여준다. 자신의 신체조건에 맞게 행성을 개량하던 쟈리는 짐승의 모피로 추위를 막을 줄 알게 된 두발 짐승, 아마도 인간, 을 지켜보는 인류학자의 위치에 섰다가 자식을 내놓은 아버지 혹은 조물주의 책임을 느끼기에 이른다.

대지의 반영웅 혹은 시간의 영웅들

오랜 문학과 신화의 전통에서 태어난 젤라즈니의 인물들은 홀로 장구한 세월을 견디는 영웅이기도 하다. 그들은 뿌리가 되는 세상이 늙어가는데도, 그 많은 기억을 짊어지고, 청년의 모습으로 살아야만 한다. <반지의 제왕>의 엘프와 비슷하나 동족도 없이. 이들은 낯선 존재가 아니다. 영웅 신화의 원형을 탐색하는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북미 인디언 신화에 등장하는 교활한 반영웅 코요테, 저승에 도전한 수메르 신화의 영웅 탐무즈, 아발론으로 떠난 아더왕. 평자들이 젤라즈니의 소설에서 발견하곤 하는 참고서적들은 나뭇단처럼 하나로 묶이면서도 제각기 형태와 성격이 다르다. 그 때문인지 <저주받은자, 딜비쉬>와 <내 이름은 콘래드>와 <앰버 연대기>의 왕자 코윈은 가끔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한편 혹은 연작소설 안에서 환골탈태하곤 한다. 딜비쉬는 사악한 흑마법사 젤레락의 저주로 지옥으로 추방돼 200년 동안 악마들의 고문을 견디고 돌아온 영웅이다. 해방자를 고대하던 사람들의 소망이 지옥에까지 미쳐 그를 소환했다. 그런데도 딜비쉬는 체신없이 여인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고 쓸데없는 영웅의 기질을 과시하고 스스로 인정하듯 센티멘털하다. 이것은 치명적인 약점일 수 있겠지만 괜찮은 위트일 수도 있다. 젤라즈니는 SF문학이 가치를 인정받아 아카데믹한 분석과 창조의 대상이 되면서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재미를 잃어가고 있다고 걱정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앰버 연대기>는 젤라즈니 최고의 걸작은 아닐지 몰라도 가장 흥미로운 작품 중 하나로는 손색이 없을 것이다. 젤라즈니는 고속도로를 달리며 딴생각을 하다가 느닷없이 19세기적인 풍경과 마주한 경험에서 <로드마크>를 썼고 다시 <앰버 연대기>로 확장했다. 이 시리즈에서 지구는 앰버의 왕족들이 투사한 환영에 불과하다. 진짜 세계인 앰버의 허상인 것이다. 그러나 그 허상에서도 역사가 흘러가고 앰버에 영향을 주는 존재가 태어난다. 또한 앰버의 왕족들은 권모술수의 화신이다. 같은 아버지와 다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들은 ‘보석’이 부여하는 힘을 손에 쥐고자 하는 야심 때문에 동족살해와 전쟁마저 불사한다. 젤라즈니는 세권으로 계획했던 이 연대기를 다섯권으로 일단락하고 <신 앰버 연대기>까지 쓰면서 동료인 어슐라 K. 르 귄의 <어스시> 시리즈에 비할 만한 세계를 완성했다. ‘어스시’처럼 지도를 그릴 수는 없지만, 패턴을 통과하여 실재를 획득하는 다층의 지배양식은, 바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어스시’의 섬들처럼 포개지고 분리되는 구조를 만들어낸다.

창작의 초기와 중기에 재능을 소진한 젤라즈니는 일찍 쇠락한 작가에 속한다. 그는 삼십대 초반에 <신들의 사회>를 썼고 말년에 이르러선 병 때문에 졸작을 내놓지는 않았나 애정섞인 우려를 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짧고 찬란했던 절정만으로도 10주기를 맞은 젤라즈니를 추억하기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아더 왕의 전설을 창의적으로 변용한 <캐멀롯의 수호자>에서 호수의 기사 랜슬롯은 천년 만에 주문에서 풀려난 대마법사 멀린을 봉인해야 하는 난관에 이른다. “캐멀롯의 마지막 현자였던 멀린과 모건 르훼이와의 모험의 기록은 여기서 끝을 맺는다. 의로움과 영광이 이끄는 곳으로”라는 마지막 문장. 과학의 시대에 신화를 간직했던 젤라즈니의 비문으로도 적절한 듯싶다.

시간과 운명 그리고 신화의 미로

로저 젤라즈니의 소설집과 연작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김상훈 옮김/ 열린책들 펴냄

로저 젤라즈니는 1960년대에 재능의 절정을 과시한 작가였다. 그 시절의 중편과 단편을 모은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는 빛을 조각조각 반사하는 다면체처럼 현란하고 다채로운 소설집. 두 페이지에 불과하지만 신화적이고 쓸쓸한 <괴물과 처녀>에서 한 가지 소재를 끈질기게 물어뜯는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에 이르는 실험을 만날 수 있다. 마지막에 수록된 <캐멀롯의 마지막 수호자>는 1979년작.

젤라즈니를 SF문학의 신성으로 만든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는 고대문명의 흔적만을 끌어안고 살면서 종말을 기다리는 화성인들의 묵시록이다. 그들의 오래된 문서에 접근하도록 허락받은 지구인 언어학자 갤린저는 신전에서 춤추던 여인 브락사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 만남과 이별이 예정된 결과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미지의 문명과 조우한 이방인을 주인공으로 택한 이 소설은 과학의 기치를 들이대는 대신 주어진 운명에 복종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복종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은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우주로 옮겨놓은 듯한 단편. 장비와 무대는 우주시대지만 불가능을 욕망하는 남자는 시대를 초월한다. 이 밖에도 다소 쫀쫀한 다툼에서 참신한 결과를 빚어내는 <프로스트와 베타>, 호러의 분위기가 배어 있는 <악마차>, 행성 그 자체의 두려움과 마주하는 <이 죽음의 산에서> 등이 있다.

<저주받은 자, 딜비쉬>

김상훈 옮김/ 너머 펴냄

<신들의 사회>와 함께 복수에 매혹된 젤라즈니의 성향을 보여주는 단편 연작. 포타로이의 해방자 딜비쉬는 처녀를 산 제물로 바치려는 흑마법사 젤레락의 의식을 방해했다가 지옥으로 추방된다. 그의 육체는 돌이 되었고 그의 영혼은 악마들에게 묶여 있다. 200년이 지나고 또다시 함락 위기에 처한 포타로이의 주민들은 전설 속의 영웅을 고대하고, 그들의 소원은 딜비쉬의 사슬을 끊기에 이른다. 강철로 만들어진 군마 블랙을 타고 귀환한 딜비쉬. 그는 포타로이를 해방한 다음 젤레락을 찾아 떠난다. 여러 잡지에 나누어 개재되었고 10년의 공백을 두기도 했던 딜비쉬 연작을 시대순으로 재배열한 작품. 가끔 농담처럼 나오는 미래문명의 암시를 제외하면 순수한 판타지에 가깝다. 마녀들이 딜비쉬의 과거를 간접적으로 설명하는 <셀린데의 노래>, 죽지 못하고 떠도는 유령 군단을 소환하는 <쇼어던의 종>, 미로에 빠진 앨리스와도 같은 느낌을 주는 <분할된 도시>처럼 하나의 인물을 다양한 장르 안에 던져두는 재미가 있다.

<앰버 연대기>

김상훈 옮김/ 예문 펴냄

1970년 발표된 <앰버의 아홉 왕자>로 시작해 8년 뒤에 <혼돈의 궁정>으로 막을 내린 첫 번째 시리즈. 젤라즈니는 1985년부터 코윈의 아들 멀린이 뒤를 이어받은 <신 앰버 연대기> 다섯권을 써서 시리즈를 완성했다. ‘나’는 과거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채 요양소 침대 위에서 깨어난다. 누이동생 에벌린의 존재를 알게 된 그는 요양소에서 탈출해 동생의 집을 찾아가고, 낯익은 초상이 새겨진 트럼프 카드를 발견한다. 카드를 보는 순간 떠오르는 이름들, 조각들, 아름다운 여동생 데어드리, 그녀 때문에 찌르듯이 아파오는 마음. 그는 앰버의 왕자 코윈이었고 왕위를 둘러싼 다툼에서 패해 앰버의 그림자 세계로 유폐된 것이다. <앰버 연대기>는 트럼프와 그것을 만든 장인 드워킨의 비밀, 세계를 지배하는 열쇠 ‘심판의 보석’, 사라진 국왕 오베론 등을 연이어 내밀면서 다음 순간을 짐작할 수 없는 복잡한 피카레스크의 구조를 따라간다.

신화는 저 멀리 우주 속으로

로저 젤라즈니의 장편소설

<내 이름은 콘래드>

곽영미, 최지원 옮김/ 시공사 펴냄

절판되어 SF 팬들의 애를 태우다가 올해 4월 재출판됐다. ‘사흘전쟁’ 이후 지구는 폐허가 되어 외계종족인 베가인들의 휴양지 겸 황폐한 문명체험 투어용으로 전락했다. 아마도 수백년을 살아왔을 카라기오시스는 전쟁 이후 식민행성에서 지구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귀환운동의 리더였지만, 지금은 콘래드라는 이름의 예술유적문서 보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가 떠난 짧은 여행이 <내 이름은 콘래드>의 중심이다. 베가인 명사 미슈티고는 반드시 폐허만을 여행해야 하고 반드시 콘래드가 안내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여행단을 조직한다. 그는 왜 이곳에 온 것일까. 콘래드는 그의 목적이 지구의 운명과 관련돼 있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젤라즈니가 “내 첫 번째 장편이라는 매우 센티멘털한 이유로 아끼는” <내 이름은 콘래드>는 신화 속을 거니는 듯한 몽환적인 소설이다. 사티로스와 반인반수에 가까운 사자가 등장하고, 이아손의 원정대가 직설적으로 인용되며, 오염으로 인한 기형아들은 대부분 신화 속의 생명체와 닮아 있다. 영원의 세월을 체험한, 현명하나 유머러스한 현자가 들려주는 전설과도 같은 소설.

<신들의 사회>

김상훈 옮김/ 행복한 책읽기 펴냄

힌두 신화와 불교를 정체불명의 미래사회에 이식한 소설. 젤라즈니는 “영혼의 이식과 환생을 설명하기 위해선 힌두 신화와 불교가 제격이었다. 게다가 북구와 켈트 신화는 너무 흔했다”라며 먼 동방의 신화를 끌어들인 이유를 설명했다. ‘빛의 왕’(이 소설의 원제이기도 한 <Lord of Light>라 불리는 사내가 영혼이 파장의 형태로 존재하는 ‘신들의 다리’ 너머에서 불려온다. 그는 이 행성을 개척한 ‘1세대’의 일원이었다. 그의 동료들은 고향 우라스에서 가져온 신화와 영혼을 마음에 드는 육체에 이식하는 과학기술을 이용해 신의 자리에 앉았지만, 샘 혹은 마이트레야라고도 불리던 그는 자손들에게 반역을 가르쳤다. 그가 돌아왔으므로 태양조차 눈을 돌린 피의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지배의 논리로 힌두 신화를, 반역의 논리로 불교를 택한 신화적인 소설. 그러나 지식을 향한 갈망과 지식의 독점으로 인한 계급구분, 제어할 수 없는 진보는 당대 사회의 고민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60년대 SF 뉴웨이브가 있었다

J. G. 발라드의 종말 3부작부터 어슐러 르 귄의 <어둠의 왼손>까지

누벨바그(뉴웨이브)라는 단어가 영화사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이 변혁으로 끓어올랐던 1960년대, 서구 SF문학계에서는 ‘뉴웨이브’라 불리는 사조가 시작되고 있었다. 영국에서 시작된 이 사조는 우주공간으로 대표되는 ‘외우주’(外宇宙)에 머물러 있었던 SF문학의 범위를 인간 내면의 ‘내우주’(內宇宙)로 확장하자는 운동이었다. 간결하게 두 가지로 정리하자면. 첫째, 과학적인 논리에 천착해 있던 주제의식에서 벗어나 좀더 능동적으로 사회와 개인을 작품에 반영하자는 것. 둘째, 폄하받아왔던 SF의 가치를 재조정하기 위해 문학성을 좀더 강화하자는 것이었다. 뉴웨이브 운동이 시작되자 SF계는 크게 달라졌다. 금기시되어왔던 섹스나 마약을 소재로 삼거나 인간의 심리를 끈질기게 파고드는 실험적인 작품들이 늘어났고, 심리학이나 기호학이 본격적으로 도입됐다. SF를 과학소설(Science Fiction)이 아니라 사색소설(Speculative Fiction)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도 이 무렵이다.

뉴웨이브 작가군에서도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작가는 <태양의 제국>과 <크래쉬>의 원작자로도 유명한 J. G. 발라드다. 뉴웨이브 운동의 이론가였던 그의 대표작은 종말 3부작 <침수한 세계> <불타는 세계> <크리스탈 월드>를 꼽을 수 있다. 이 연작은 지구종말의 외부적인 묘사에만 치중했던 예전의 SF와는 달리 다가온 지구종말에 반응하며 변화해가는 인간의 모습을 지극히 유려한 필체로 그려낸 걸작들이다. 마이클 무어콕은 사실 판타지 작가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으나 SF 잡지 <뉴 월즈>의 편집자가 되면서 실질적으로 영국 뉴웨이브 운동을 체계화했다. 뒤에 SF계가 낳은 최고의 SF평론가로 자리매김한 브라이언 올디스는 스필버그가 감독한 <A.I.>의 원작 <Supertoys Last All Summer Long>으로 알려진 작가. “우주에서 인간에 대한 정의와 그 위상을 알고자, 혼란스럽지만 진보하고 있는 지식의 테두리 안에서 노력하는 것”이라고 SF를 정의했던 그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 최초의 SF였다는, SF계에서는 가장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기원론을 제창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논란을 많이 불러일으키는 작가’라는 별명을 가진 할란 엘리슨은 뉴웨이브계의 가장 대담한 악동이었다. 그는 주로 단편이나 중편에 매진했는데, 도발적인 주제의식을 <환상특급>이나 <스타트렉> 등의 TV시리즈까지 연결시키면서 왕성한 저작활동을 자랑했다. 영국 뉴웨이브의 절정은 사실상 미국에서 마무리됐다(미국 뉴웨이브). 로저 젤라즈니어슐러 르 귄이라는 걸출한 두명의 거장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어슐러 르 귄은 한국에서도 출간된 <어둠의 왼손> <바람의 열두방향>과 판타지 <어스시> 시리즈로 널리 알려진 여류작가로, 인간의 내우주를 기술하는 그의 유려한 언어는 지적인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하다. 어슐러 르 귄의 높은 문학성은 “SF작가 중에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면 그일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뉴웨이브 운동이라는 사조 자체는 빠르게 소멸했다. 전통적인 장르의 법칙을 파괴하는 데 치중하던 뉴웨이브계는 (위에 언급한 몇몇 거장들을 제외하고는) 지나치게 실험적인 기법만을 과시하는 작품을 양산하다가 대중과 멀어졌고, 전통적인 과학기술을 소재로 하는 하드SF의 시대가 다시 시작됐다. 하지만 60년대 SF문학계의 뉴웨이브는 매너리즘에 빠진 SF의 문학적 질을 월등하게 향상시킨 계기가 되었고, 다음 세대의 작가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면서 80년대 사이버 펑크 운동을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