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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고양이 공화국의 시민으로 살기 위하여
이종도 2005-06-24

고양이와 개에 관한 진실. 이렇게 분류하는 것조차 지적이며 오만한 고양이들에겐 모욕이다. 개들은 고개를 끄덕거리거나 꼬리를 흔들거나 하고 말 것이다. 잡지사는 고양이들로 지천이다. 나무늘보가 되고 싶어하는 고양이, 토토로같이 생긴 고양이, 생선회를 안 먹는 고양이…. 다 제각각이다. 고양이 분양 소식이나 이사 소식이 들리면 삼삼오오 몰려서 귀를 쫑긋 세운다. 한때 개였으나 이제 고양이과로 전과하는 고양이 두 마리도 있다. <안녕, 프란체스카>를 거의 보지 않고, 당구를 치며, 늙었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고양이 시민 가운데 드러내 놓고 <남극일기>를 지지하기도 했는데, 원체 고양이는 추운 데를 질색하며 싫어하니까. 둘 중 하나는 최근 고양이 양육으로 화제를 모았으며 여성고양이에게 조금 더 많은 전화가 온다.

보신탕 먹으러 가자, 누가 그러면 우르르 몰려나갔다가 우르르 돌아오는 일은 고양이 공화국에선 매우 드문 일이다. 조용히 뿔뿔이 흩어졌다가 조용히 다시 모인다. 헤프기보다는 절제되고 독립된 생활양식. 구속없는 유희, 자유롭게 선택하는 쾌락. 자기 정신에 대한 배려라고나 할까. 그런 점에서 푸코적인 고양이들. 다닌 대학도 고양이 공화국이었다. 문패는 문학이라고 쓰여 있는데 고양이들은 거리낌없이 문학을 덮고 영화를 보러 다녔다. 적응이 안 되었으나 근대인의 삶은 고양이의 삶임을 뒤늦게 깨닫고 고양이의 행렬에 동참했다. 시대의 물살은 참으로 거세다. 마침내 나는 배교했고 망명했다. 강아지 왕국의 신민에서 고양이 공화국의 시민으로. 그러는 데 12년이 걸렸다. 나만큼이나 쓸데없이 오랫동안 학교에서 배회한 고양이로 청년필름의 김광수대표고양이가 생각난다. 학점이 기록적으로 나빴다고 즐거워하는 모양이 또한 고양이스럽다.

강아지 왕국에서 사는 방법은 ‘호명’과 대답이다. 알튀세르라는 고양이가 한 얘기다. ‘이리와’ 하면 꼬리 치며 군대 가고, 세금 내고, 헌금 내는 강아지들로 사회가 구성된다는 것이다. 고양이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간에 이제 이리 오너라 하면 꼬리를 흔든다는 공식은 무너진 지 오래되었다(고 고양이들은 믿는다). 고양이는 힘이 세다. 왕성한 번식력. 그리고 그만큼 무정부적으로 늘어나는 수많은 저항의 거처들. 밤거리를 배회하는 들고양이들. 복되도다, 자유로운 고양이들이여.

집에 갔더니 나도 고양이임을 알게 되었다. 집에 동거인보다 먼저 도착했다. 그의 품이 굉장히 그립다. 그의 뱃속으로 들어가서 태아처럼 웅크리고 잠들었으면 좋겠다. 그가 왔다. 겨드랑이, 다리, 옆구리…. 틈만 있으면 사정없이 파고드는 꼴이 요크셔 테리어다. 1분36초 만에 지겨워졌다. 어, 메일 체크 좀 해야 돼. 일이 있거덩. 내 방으로 쏙 들어왔다.

고양이를 만드는 것은 환경이다. 그것은 애인을 데려올 수 있는 독립된 방이다. 난 스물여덟에 고양이과로 전과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 영화동네를 고양이들이 접수하게 된 까닭도 여기 있을 것 같다. 타장르에 비해 합리적인 제작환경, 다매체가 융합된 놀이(변덕스런 고양이에게 제격이다), 홀로 또는 여럿이 돌아다니며 언제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접근성. 영화는 고양이 시대와 함께 진화하는 고양이친화적 예술인 것이다. 이 늦은 새벽에도 영화관을 어슬렁거리거나 시나리오 앞에서 뒹구는 고양이들 많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