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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복제되고 증식하는 죽음, <회로>

인류의 절멸은 새로운 희망을 품는 방법이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역설적 계시록.

언제부터인가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컴퓨터는 스스로 존재하는 듯 접속하지도 않은 어떤 장면들을 보여준다. 그 장면에 비친 사람들은 괴상한 속도로 움직이고, 더러 물끄러미 모니터 바깥을 응시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유령을 만나시겠습니까”라는 문자가 뜬다. 그들은 죽은(을) 혼령들이고, 이제 그 이미지를 본 사람도 그들처럼 죽어갈 것이다. 이 죽음의 바이러스는 단지 모니터 안의 이미지로만 남지 않는다. 혼령들은 세상에 나타나고, 그들이 사라지고 남은 자리에는 검은 칠로 그을린 형체만 남는다. 처음에는 마치 그것이 한 마을에서나 있을 법한 괴담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치(구미코 아소)와 료스케(하루히코 가토) 두 주인공을 따라가다보면, 그리고 그들 주변 사람들의 실종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인류 전체가 같은 방식으로 멸망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세상은 텅 비고 살아 있는 생명은 모두 절멸한다. 미치와 료스케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사라진 곳에서 필사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다.

<회로>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2001년작 공포영화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무엇보다 불가해함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그가 자주 공포영화를 다루는 이유도 그것이 장르적 쾌감을 가져다주는 기능적 이유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불가해한 것의 이면을 보여주기에 적절한 영화적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회로>는 그의 공포영화 중에서도 가장 섬뜩한 작품에 속한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회로>에서 이유있는 죽음을 다루지 않는다. 끝없이 복제되고 증식하는 죽음만을 다룬다. 거기에는 원한의 사다코가 출현하는 대신 여럿의 익명들이 차례로 실종하는 것만 있다. 죽음을 부르는 어떤 원한이 있다거나, 죽음을 피하기 위한 어떤 방책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앞과 뒤만 있을 뿐 전부 다 죽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벗어날 수 없는 이 영화의 회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언젠가 구로사와 기요시가 “제로부터 시작하는 욕망, 사회 기성의 것들을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욕구가 여전하기 때문에 이런 작품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회로>의 묵시록적 이미지는 새로운 세상을 위한 절멸인가? 절대의 수순인가? 질문은 남지만, <회로>는 끝내 섬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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