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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과 발화점이 만났을 때, <부활>의 엄태웅
김현정 사진 서지형(스틸기사) 2005-09-02

엄태웅은 말이 없는 남자라고 들었다. <가족>에 그의 보스로 출연했던 박희순은 자신도 역시 말수가 적은 탓에 1박2일 MT 내내 말 한마디 못했다고 했다. “응… 편한 사람하고는 말을 잘해요. 형하고도 나중엔 얘기 참 많이 했는데.” 그걸로 끝이었다. 바람결에 들은 대로 그는 과묵했고, 문장 사이에 여백을 두었고, 웃음으로 빈 공간을 메우곤 했다. 그러나 언어가 의사소통의 전부였다면 이 세상에 영화나 드라마가 존재할 수나 있었을까. 눈썹 사이에 주름을 잡으면서 짧은 말로 무언가를 전하려 애를 쓰는 그를 보며 <부활>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날 엄태웅은 자신을 키워준 서재수(강신일)가 네가 경찰이 되었을 때 세상에 태어나 두 번째로 기뻤다고 말하자, 조금 부끄러운 듯, 하지만 정말 좋아하면서 웃고 있었다. 그런 웃음은 다르다. 눈과 코와 입과 얼굴 구석구석 퍼진 근육을 모두 움직여야만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진실. 케이블 TV 재방송으로 우연히 본 그 장면 때문에 나는 두고두고 <부활>을 보게 되었다. 그 순간 뜨거운 물에 떨어뜨린 얼음이 쨍, 하고 갈라지는 소리를 들었던 탓이었다.

뜨거움과 차가움이 공존한다, 는 보도자료스러운 설명만으로는 부족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실미도> <가족> <공공의 적2>의 그는 돌벽을 둘러친 듯 자신을 가두거나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분노로 가득 찬 듯했는데. 그러나 엄태웅은 자신이 어떤 파장을 간직한 배우인지 알아차리고 있는 듯했다. “<구미호 외전>하고 <쾌걸 춘향>을 내가 모니터했어요. 그걸 보니까 강해 보여도 무너질 것 같고 안돼 보이고 스산한 느낌이 있더라고요. 아이 같기도 하고. 내 감성이 원래 그런가봐요. 막내이고 외로움을 타니까.” 뻔한 과정일 수밖에 없어도, 과거의 기억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오래오래 무명이었고, 사전적이고 정치적인 의미와 관계없이 ‘남자’라는 느낌을 주는 외모가 그를 가로막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직접 듣고 싶은 사연이었다.

엄정화의 동생이라는 배경에 전혀 덕을 보지 못했던 엄태웅은 찬란해야 마땅한 이십대의 대부분을 방구석에 누워 비디오테이프 갈아끼우는 일로 소일했다. “대학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스물여섯에 연극영화과에 들어가기는 했는데, 오래 사귄 여자친구가 헤어지자고 하더라고요. 뭔가 보여주고 싶어서, 그런데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학교에 갔죠. 미래를 제시하고 싶어서. 전문대 간다고 미래가 제시되겠어요? (웃음) 결국 헤어졌어요.” 스물과 스물여섯 사이. 엄태웅은 배우가 되고 싶었지만 딱히 꿈을 내보일 수도 없어서 그저 시간을 흘려보냈다고 했다. 그런데도 꿈을 접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보컬이 실종된 친구 밴드를 위해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을 때 박수받는 직업을 갖고 싶어졌다고, 그 자신도 납득 못할 이유를 대면서. 다른 직업을 택할 데드라인 따위를 왜 설정해놓지 않았는지 정말 모르겠다면서.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야망에 몸부림치는 특이 체질이 아니라면, 고만고만한 청춘의 모습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음속으로 활시위를 당긴다 해도 시위를 놓는 모습은 꿈속에서나 가능한. 그랬던 그를 <부활>로 이끈 건 신기하게도 박찬홍 PD의 꿈이었다. “감독님이 제가 꿈에 나와서 캐스팅했대요. (웃음) 직접 만나보니까 욕심이 없어서 마음에 들었다고, 나중에 그러시더라고요. 웬만한 배우는 열심히 하겠습니다, 시켜만 주십시오, 그러는데, 저는 자신없는데 괜찮으시겠냐고 했다고.” 패기없는 젊은이라 욕먹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쉬운 말들만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소중한 나약함일 수도 있었다. “처음엔 무서웠지만 뻔뻔하게 가자고 마음먹었어요. 시청률이 바닥을 쳐도 ‘세상이 이럴 수가’ 하면서 서로 아꼈고.” 절친한 친구들의 음모 때문에 목숨을 잃은 아버지, 생이별한 쌍둥이 형제, 같은 이들의 손에 헤어져 자란 동생을 잃은 형의 복수. 고전적인 복수의 연쇄사슬을 깔고 있는 <부활>이 마니아들의 마음속으로 폭주한 건 본능을 자극하는 감성과 함께 그런 신뢰의 힘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실미도>로 본격적인 경력을 시작하고 <쾌걸 춘향>으로 스타의 가능성을 보이며 <부활>로 비상하기까지, 엄태웅은 몇번이고 마음에 할퀸 자국을 남겼다. 애는 착한 것 같은데 나중에 보자, 칙칙하게 생겼다, 대사에 호흡이 없다. 그런데도 말수 적은 이 남자는 하은처럼 얼굴 전부를 사용하면서 웃었다. “그때는 칙칙해 보였을 거예요. 우울했고 생활도 불규칙했거든요.”

그처럼 아무 생각없는 배우가 어떻게 도약했을까, 그것 또한 궁금했다. “하은이는 최고로 편한 배역이었어요. 처음 풀어진 배역을 맡았고 갑자기 튀어나온 악역도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모든 게 나한테 맞춰지잖아요. 나를 위주로 돌아가고.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더라고요.” 한번 해보자. 그는 그랬다고 했다. 진한 눈썹과 매서운 눈빛, 지나치게 잘생긴 콧날에 어울리는 도박꾼의 자태인 듯도 싶었다. 그 순간 다시 한번 뒤집는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는데 누나만 넷이었어요. 소심하고 내성적이고 여자 같을 수밖에 없었죠. 그런 게 재미있어요. 겉과 속이 똑같으면 재미없잖아요. 생긴 건 남자 같은데 그 안은 소심한, 그런 게 내 매력인 것 같고….” 그의 말을 들으며 <쾌걸 춘향>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몽룡(재희)이 채린(박시은)과 키스하는 걸 목격한 춘향(한채영), 그녀를 돌려세우며 보지 말라고 속삭이는 변학도. 그날 밤 그의 팬클럽 회원이 10만명까지 치솟았다고 했다. 모두들 그 소리를 들은 게 아닐까. 쨍, 하고 파열하는, 차갑고 단단한 얼음이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그 틈새로 물이 흘러들어 맑게 떨어지는 듯한 환청을 듣지 않았을까.

부티나는 얼굴 덕분에 전학온 서울 중학교에서 친구를 얻은 아이, 그러나 친구들을 데리고 가난한 집에 갔던 다음날부터 노골적으로 따돌림을 받았던 아이. 일찍 쓰디쓴 체험을 얻은 엄태웅은 아이언 마스크로 감정을 가렸을지도, 미술을 했던 섬세한 감성은 때를 얻는 순간까지 철가면 아래 웅크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아이가 사라지지 않고 그림자로 남아서, 전형적인 조폭 2인자인 <가족>의 동수가 조금 착해보였나보다. 변학도가 사랑의 유효기간을 눈치챈 가엾은 남자로 보였나보다.

이제 엄태웅은 한두달 쉬면서 갑자기 늘어난 시나리오를 천천히 검토할 것이다. 그가 바라는 영화는 사람이 사람으로 하여금 웃고 울게 만드는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영화다. 그 말을 들으며 또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다시 <부활>. 버스에서 하은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잠든 은하(한지민)가 깨지 않도록 온 정성을 기울여 팔을 둘러준다. 거르지 않고 밥을 잘 먹고, 진심으로 웃을 줄 아는, 착하면서 사려깊은 아이가, 데면데면 인사하고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에서 친절하게 인사를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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