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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의 <외출> [1]
김혜리 2005-09-08

허진호의 멈추어진 느린 발걸음, 세 번째 장편 <외출>을 말한다

멜로드라마 장르를 통해 생의 고요한 이면을 사려 깊게 들추었던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의 허진호 감독.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로 스크린에 안착한 직후 아시아에 불어닥친 한류 열풍으로 독보적 지위를 점한 배우 배용준. 여러 편의 사랑영화에서 착실한 실적을 쌓으며 이미지와 연기력을 연마해온 배우 손예진. 제작에 연루된 이름만으로도 떠들썩했던 영화 <외출>이 9월8일 개봉을 앞두고 지난 8월23일 1천명에 가까운 취재진이 몰려든 시사회에서 공개됐다. <봄날은 간다> 이후 4년 만에 스크린에 나선 허진호 작품 3번 <외출>은, 느린 걸음을 떼는 사랑영화라는 점에서는 전작 두편과 유전자가 같다. 그러나 ‘선정적인’ 소재와 직설화법을 선택해 출발부터 전작들과 상당한 거리를 두었던 이 영화는 도착지도 적잖이 낯설다. <외출>의 면면을 살피고 그 와중에 떠오른 질문들을 허진호 감독에게 던졌다.

(이 기사에는 스포일러로 간주할 수 있는 정보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 남자의 얼굴을 카메라가 바짝 다가서서 들여다본다. 비명을 삼키는 듯 떨리는 그의 얼굴은 색색 조명까지 드리워 붉으락푸르락하다. 우리는 화면 밖 벨소리로 그가 전화 한통을 받았음을 알고 있다. 인수(배용준)는 콘서트 조명감독이다. 그는 아내 수진(임상효)이 삼척행 국도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전언을 받았다. 일터를 빠져나와 차를 달리는 그의 앞길에 눈발이 저주처럼 달려든다. 그가 도착한 병원에는 이미 한 여자가 처박혀 흐느끼고 있다. 수진과 동승한 남자 경호(류승수)의 아내 서영(손예진)이다. 길가에 흩어진 아내와 남편의 뻔뻔한 소지품들은 명백한 하나의 진실을 가리킨다. 수진과 경호는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리고 거짓말쟁이였다. 인수와 서영은 같은 흙탕물을 뒤집어쓴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이 정황을 알릴 성격이 못 된다. 그리하여 남녀는 기묘한, 그러나 관객이 능히 앞으로 궤적을 짐작할 수 있는 처지에 떨어진다. 둘은 극히 서먹하고 불편한 거리에 있는 동시에, 졸지에 서로에게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게 정직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인수와 서영은 단순하고 천진하고 성실한, 말하자면 같은 당파에 속하는 인간들이다. 자, 이제 남은 일은 등식의 한쪽 변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상한 사랑이 다가오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텅 빈 밀실 같은 낯선 도시에서 사랑하다

“그들도 우리 같았을까요?” 이런 목소리를 우리는 <외출>과 유사한 구도를 세운 <화양연화>와 <랜덤 하트>에서 들은 적이 있다. 왕가위 감독은 양조위와 장만옥을 배반한 배우자들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은 시종 목소리만으로 흐느끼고 거짓말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한다. 어쨌거나 그들은 영화 속에서 내내 살아 움직이며 양조위와 장만옥의 세계에 어른거린다. <화양연화>는 이중생활을 영위하는 장만옥의 상사, 한 건물에 사는 이웃들의 이야기로 두 주인공이 걸려 있는 그물을 짰다. <랜덤 하트>는 배우자의 불륜과 거기서 파생되는 제2의 사랑이 중년 남녀에게 사회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흥미를 보인다. 아내와 남편이 사고로 죽어버린 해리슨 포드와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의 사랑은, 그들이 과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시드니 폴락 감독은 이들의 고민이 현대사회에서 얼마나 보편적인 과제인지 암시한다.

그런데 허진호 감독은 <외출>에서 사회적 관계를 차단한다. <8월의 크리스마스>나 <봄날은 간다>에서 그토록 중요했던 가족은 여기에 부재하거나 의례적으로 얼굴만 내민다. 둘의 배우자는 <화양연화>처럼 살아서 그들과 대칭의 구도를 그리지도 않고 <랜덤 하트>처럼 아예 죽어 없어져 그들을 일상으로 돌려보내주지도 않는다. 식물인간 상태인 배우자들에게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따져 물을 수도 없다. 삼척 모텔에 투숙하며 기약없는 간병 생활에 들어간 인수와 서영에겐 직장에 나갈 의무도, 살림을 할 책임도 유예된다. 두 사람 외에 살아 움직이며 영향을 끼치는 존재는 날씨와 계절뿐이다. 인수와 서영의 삼척은 마치 텅 빈 커다란 밀실 같다. 이 밀실의 감각은 “추워요?” “춥지 않으세요?” “우리 뭐 할까요?” “뭐 하고 싶으세요?” 하는 식으로 상대방의 말을 모방하는 메아리 같은 대사들로 말미암아 증폭된다. 그리하여 좋아하는 여자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는 버릇이 있는 남자와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화분을 선물하는 심성을 가진 여자는 사랑에 빠진다. 오래전에 예정된 것처럼.

허진호, 관조하기를 멈추다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는 사랑의 생성과 소멸을 조바심내지 않고 점묘하는 영화였다. 거기서 사랑은 그냥 사랑만도 아니어서 인생을 싣고 흘러갔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는 청년이 죽었고 <봄날은 간다>에서는 소년이 성장했다. 허진호 감독의 연인들은 언제나 무언가 왔다가 사라진 자리를 골똘히 바라보았고, 우리도 덩달아 그곳을 응시하곤 했다. 반면 <외출>의 사랑은 일종의 스캔들이며 사태다. <외출>이 탐구하는 대상은, 증오와 절망으로부터 갑작스레 전이된 격정이다. <외출>의 연출에 앞서 허진호 감독은 “내 영화에서도 감정이 표출되었으면 좋겠다”고 분명히 밝혔고 카메라도 인물에 부쩍 접근하리라 예고했다. 배우의 속눈썹까지 구속하는 <외출>의 잦은 근접 숏과 즐겨 쓰던 원거리 숏의 절제는, 감독의 결의를 반영한다. 또 감정의 분출을 그릴 때 <외출>은 거의 강박적으로 울음과 육체적 증세들을 사용한다. 인수는 아내의 외도를 녹화한 비디오를 보다가 구토하고, 세수하다 코피를 흘린다. 둘은 수면제를 사러간 약국에서 마주친다. 클리셰의 위험을 감수하고 허진호 감독은 몸으로 앓는 절망을 보여주려 애쓴다.

관조의 시선을 버리고 두 인물에게 바짝 밀착함으로써 발생한 일면은,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서 입체감이 약화된 드라마다. 불륜이라는 스토리에 있을 법한 연애의 일화들은 그럴 법한 순서로, 쌓이기보다 늘어놓아진다. 때로 생략하고 때로는 확장하며 사랑이라는 감정의 무게를 새롭게 저울질했던 전작들의 리듬감과 아이디어가 <외출>은 부족하다. 인수와 서영은 때로 삼척을 벗어나 서울과 해남을 오가지만, <봄날은 간다>에서 서울과 강릉 사이에 놓여 있던 아득한 거리감은 발생하지 않는다. <외출>의 극단적 상황이 몰아낸 또 다른 요소는, 허진호 영화에 특유한, 미소와 실소의 순간들이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애틋한 밤에 고스톱을 치다가 서영이 “다시 계산해보세요”라고 주부답게 말할 때와 같은 환기(換氣)의 순간이 <외출>에는 그리 많지 않다. 이렇게 달라진 <외출>에서 전작들과 혈연을 확인시키는 가장 단단한 고리는 인물의 이미지다. 침울해지면 아기처럼 새우잠을 자고 머리를 엉클어뜨리는 남자와 화분을 건네고(<봄날은 간다>), 길에서 하드를 먹고(<8월의 크리스마스), 순백의 속옷을 예쁘게 입는 여자(<따로 또 같이>)는 여기에도 있다.

그 남자의 사정, 그 여자의 사랑

배용준의 인수는 눈덩이를 던질 때조차 진지한 남자고, 아마도 인생 계획이 그다지 어그러져본 적이 없는 남자다. 한류의 아이콘으로서 영화 바깥의 강력한 이미지를 짊어진 배용준은 정면보다 카메라가 뒤나 옆에서 찍을 때가 좋고, 혼자만의 신이 더 좋다. 아내의 외도를 찍은 비디오를 틀어놓고 옹송그린 모습, 차 안에서 시트를 젖힌 채 인생은 아름답다고 악쓰며 노래하는 뒷모습이 그렇다. 한편, 손예진의 서영은 우울의 바닥에 누워 있다가도 남자의 귀여운 짓에 웃고, 데이트 상대가 도중에 아내의 병상으로 달려가면 구멍가게에서 하드를 사 먹는 여자다. <외출>의 손예진은 스크린에 어울리는 아름다움을 과시하며 장르적 연기에 있어 대단히 미더운 배우임을 입증한다.

그렇다면 <외출>은 누구의 이야기인가? 지금까지 허진호 영화는 ‘남자가 쓴 일기’였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다림과 <봄날은 간다>의 은수는 그 남자의 눈에 비친 실체가 잡히지 않는 희망이었다. <외출>에서는 그 축이 흔들린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인수가 쥐고 있다. 그러나 관객의 기억에 감정적 의지를 새기는 쪽은 여자다. 서영은 인수보다 젊지만 언제나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외출>에서 ‘욕망의 모호한 대상’은 인수다. 둘의 연애에서 서영이 적극적 주체로 보이는 것은 그녀가 행위의 제값을 치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영은 불륜의 사랑으로 인해 숨거나 방치되는 모멸감을 경험하며 인수와 같이 있던 시각에 남편의 죽음을 맞는 ‘징벌’까지 당한다. 멜로드라마에서는 치욕과 가책에 발목을 담그는 쪽이 관객에게 더 큰 힘을 발휘하는데 <외출>에서 그것은 인수가 아니라 서영이다.

생의 아이러니와 영화의 아이러니

<외출>이 그리고자 한 ‘저 너머’의 주제는 삶의 아이러니라고 허진호 감독은 말했다. 배우자들의 사랑을 더럽게 여겼으나 결국 자기가 그 자리에 서 있음을 깨닫는 역설은, 되살아난 아내에게 “처음에는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지금은 없어”라고 말하는 인수의 대사와 경호의 영정을 사이에 두고 마주선 서영과 인수의 이미지에 압축된다. 그런데 이 순간들은 의도만큼 영화 전체를 아우르며 관객의 주의를 끌지 못한다. 원인의 하나는 가족과 사회관계를 최소화하고 인수와 서영의 결혼생활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 <외출>의 구조다. 아이러니는 불륜이라 불리는 낭만적인 사랑을 밖에서 쳐다보는 타자의 위치에 있던 인수와 서영이, 그 내부로 들어가 희열을 느끼고 타자의 시선에 위협당하기에 이르는 인식의 대전환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두 주인공만 주시하는 <외출>은, 아이러니의 좌표인 타자와 외계의 존재감이 희박하다. 타인의 시선을 통해 세상 속에서 그들의 위치가 변했음을 감지할 수 있는 순간은 인수의 장인이 예고없이 모텔을 방문하는 장면이 거의 유일하다. 한 남자의 위대한 연인이었던 서영은 순식간에 신발을 움켜쥐고 화장실에 숨어드는 죄지은 여자로 전락한다. 허진호 감독은 <외출>에서 통속극의 구도를 기꺼이 받아안으며 한층 뜨겁고 자극적인 영화를 시도했다. 인수와 서영은 자기들을 속이고 놀아났으며 그 뒷감당까지 떠맡긴 인간들의 배설물을 받아내야 하는 끔찍한 입장이다. 그리고 거기 이어지는 사랑도 어쩔 수 없는 추문이다. 하지만 <외출>은 충분히 뜨겁거나 징그럽지 않다. 인물의 감정은 크고 격렬하다. 그러나 <외출>은 이 감정을 타인이나 상황과의 부대낌으로 묘사하는 대신, 당사자의 표정을 살피고 독백과 넋두리, 울음으로 서술하는 화법을 택했다. 이 선택의 결과는 건조하고 적막하다.

<외출>이 보존한 미덕은 김소영 영상원 교수의 코멘트로 잘 요약된다. “허진호 감독은 자기만의 영화적 시간을 가진 드문 한국 감독 가운데 한명이다. <외출>에서도 그는 강한 스타 이미지를 가진 배우들에게 별로 휘둘리지 않았다. 또, <외출>의 인물들은 감정적으로 용감하다. 인수는 아내와 자신, 연인에 대한 윤리에 대해 충실하려고 한다. 그런 보살핌은 최근 한국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광포한 감정과 적막한 자연을 대조시키는 수법도 <봄날은 간다>보다 대담하다.” 허진호 감독은 분명 모험을 꾀했고, 그 모험은 단 두편의 영화로 그가 정립한 스타일에 균열을 냈다. 하지만 그 균열은 <외출>이 도전한 새로운 감정에 조응하는 새로운 형식을 완성하는 데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인상이다. 그래서 두 전작의 형식과 내용이 이룬 비범한 화음을 향한 그리움을 남긴다. <외출>은 허진호 감독에게 가을날의 변덕스런 외출일까? 가장 통속적인 소재를 껴안고도 어디까지 자신의 세계가 부서지지 않는지 더듬은 실험일까? 아니면 네 번째 영화로 예고된 <행복>을 앞두고 멜로드라마를 통해 도착할 최종 목적지를 모색하는 도중(途中)의 집일까? 인수와 서영처럼 “우리 이제 어디로 가는 건가요?”라고, 허진호 감독에게 물을 기회를 시사회 이튿날 밤에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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