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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라는 악의 고리에 사로잡힌 영혼들, <레이어 케이크>
문석 2005-09-13

수백만파운드 상당의 마약을 둘러싸고 정신나간 갱단, 세르비아 민병대 출신들, 마약 도매상, 판매책, 중개상, 그리고 또 여러 세력들이 어지럽게 뒤얽힌다. 게다가 배경이 영국이라면, 어떤 영화가 떠오르지 않나. 가이 리치의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와 <스내치>를 연상케 하는 <레이어 케이크>는, 아니나다를까 이 두 영화의 프로듀서였던 매튜 본의 감독 데뷔작이다. 하지만 초록은 동색이라는 속담까지 떠올릴 필요는 없다. <레이어 케이크>는 영국 범죄영화라는 장르의 궤도를 돌고 있지만 범죄와 범죄자들을 단지 얄팍한 영화적 재미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던 ‘영상 테크니션’ 가이 리치의 영화와 달리, 범죄라는 악의 고리에 사로잡힌 영혼들을 보여주려 한다.

끝끝내 이름이 밝혀지지 않으며 엔딩 크레딧에도 그냥 ‘XXXX’로 적힌 주인공(대니얼 크레이그)은 스스로를 갱스터가 아니라 ‘마약을 취급하는 비즈니스맨’이라 규정하는 인물이다. 그는 케임브리지대학 화학도와 함께 마약을 개발하기도 하며 마약을 중개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챙긴다. 그러나 범죄세계 또한 사회인 법, 이 모든 수익을 그가 독식할 수는 없다. 그의 곁에는 신변을 보호해주고 그를 대신해 거래에 나서는 모티(조지 해리스)와 테리가 있고, 그의 위에는 보스 지미 프라이스(케네스 크랜햄)가 버티고 있으며, 지미의 오른팔 진(콤 미니) 또한 신경써야 할 존재다. 그는 동료들과 수익을 골고루 나누며, 이들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지미에게 상납한다. 그게 이 게임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이 어둠의 세계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순간, 지미는 그의 발목을 붙든다. 지미는 주인공에게 마약중독자 재활센터를 탈출한 친구 에디 템플(마이클 갬본)의 딸을 당장 찾아내라고 한다. 동시에 주인공은 세르비아 민병대 출신 마약업자의 창고를 턴 ‘똘아이’ 듀크네 갱단과도 상대해야 한다. 지미는 듀크가 강탈한 수백만파운드어치의 마약을 당장 판매하라며 주인공을 닦달한다. 게다가 듀크 뒤에 주인공이 있다고 판단한 세르비아인들의 추적도 시작된다. 주인공의 신변을 보호해줘야 할 모티는 평생의 원수를 만나 실컷 패준 뒤 경찰의 추적을 피해 몸을 숨기니, 이제 주인공은 혈혈단신으로 임박한 파국을 맞이할 형편이다. 우습게도 이 와중에 주인공은 듀크의 조카 시드니의 여자친구 태미(시에나 밀러)에게 홀딱 반한다.

제목 ‘레이어 케이크’는 여러 층으로 이뤄진 케이크를 의미하지만, 감독인 매튜 본에 따르면, “범죄세계든 다른 곳이든 영국사회의 서로 다른 층위에 대한 은유”이다. <레이어 케이크>는 범죄 조직의 상층부터 하층에 이르는 인물들의 역학을 보여줌과 동시에 서로 오묘하게 침투해 있는 범죄의 크림과 잼과 빵의 조직을 드러낸다. 이 세계는 복잡한 사슬로 얽혀 있기에 누군가의 힘으로 통제되지 않으며, 쉽게 벗어날 수도 없다. 폭력과 충돌보다 이성과 대화를 믿으며 “난 언제나 계획대로 움직인다”고 독백하는 주인공 또한 이 운명의 태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는 케이크의 비슷한 층에 있는 다른 이들과 달리 머리를 쓸 줄 아는 덕에 시시때때로 다가오는 위기를 극복한다. 하지만 그가 세르비아인들을 따돌리고 듀크네를 속인 뒤 지미의 위협에서 벗어난다 한들 과연 케이크 맨 위에 박힌 체리의 달콤새콤한 맛까지 느낄 수 있을까.

범죄의 세계를 시시덕거리며 유영하는 대신 한 발짝 떨어져 그 세계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관찰한다는 점에서 <레이어 케이크>는 <록 스탁…>이나 <스내치>보다 마틴 스코시즈의 범죄영화들과 맞댄 면적이 더 넓어 보인다. 또 도무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사로잡힌 주인공은, 로저 에버트의 지적처럼 <좋은 친구들>의 헨리 힐(레이 리오타)을 연상케 한다. 영화 속 사건의 진행은 후반부로 갈수록 빨라지지만, 감정의 흐름은 점점 느려진다. 매튜 본 감독은 급박한 상황을 만들어놓지만, 주인공에게 오랫동안 시선을 주거나 무겁고 장중한 음악을 흘리며 보는 이의 마음을 붙든다. 주인공이 기발한 재기를 발휘해 고비를 하나씩 넘길 때마다 오히려 분위기는 침잠의 바닥으로 나아간다. 정말이지 세상은 주인공의 계획이 아니라 에디 템플이 말하는 인생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태어나는 순간 고생이 시작되지(take shit), 세상으로 나가면 고생은 더 커져. 더 높이 올라가면 고생은 적어지겠지…. 이 레이어 케이크(같은 세상)에 온 걸 환영하네.”

<레이어 케이크>가 발휘하는 어두운 매력은 반전을 거듭하는 촘촘한 플롯에만 있는 게 아니다. 수수께끼 같은 침묵과 죄의 악순환에 둘러싸인 주인공 캐릭터야말로 이 영화를 끌고가는 힘이다. 그리고 그 힘의 상당 부분은 그 역할을 수행한 대니얼 크레이그에게서 분출된다. 차기 제임스 본드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크레이그는 다소 근엄한 얼굴과 차가운 느낌의 푸른 눈을 번득이며 파우스트적인 고뇌를 보여준다. 좀 과하다 싶은 영화의 ‘후까시’와 지나치게 폼나는 내레이션도 크레이그라는 필터를 거치며 중화되는 느낌이다. 만약 그가 적은 머리숱과 차가운 인상에도 불구하고 제6대 007이 된다면, <로드 투 퍼디션> <실비아> <마더>보다는 이 영화의 덕이 더 크게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크레이그와 함께 <레이어 케이크>의 또 다른 행운은 매튜 본이 연출을 맡았다는 사실이다. 애초 이 영화는 가이 리치가 연출할 뻔했다. 유로2000대회의 잉글랜드와 독일의 경기를 보기 위해 벨기에의 기차에 올라탔던 매튜 본은 옆자리 승객과 자연스레 대화를 하게 됐고, 그가 작가인 J. J. 코널리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영국으로 돌아온 뒤 코널리의 책을 보게 된 본은 곧바로 영화화를 추진했고, 시나리오 작업 등 초반 작업에 몰두했다. 본은 가이 리치에게 이 영화의 연출을 제안했으나 리치가 거절하는 바람에 스스로 감독이 된 것. “매튜 본이 가이 리치보다 훨씬 훌륭한 감독”이라는 평가가 쏟아진 건 당연한 일이다. 영국에서 400만파운드가 넘는 흥행을 기록한 이 영화는 올해 선댄스영화제에서도 주목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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