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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강렬했던 사랑, <빨간구두>

영화는 강렬한 이미지로 시작한다. 비내리는 거리를 내려다보는 전지전능한 시선. 그 아래 사고로 나뒹구는 오토바이와 피흘린 채 쓰러진 소녀가 있다. 소녀는 병원으로 옮겨지고 그녀의 일기를 읽던 간호사는 소녀가 다름 아닌 그 병원의 외과의사 띠모떼오(세르지오 카스텔리토)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른 수술을 집도하다가 딸의 사고 소식을 접하게 된 띠모떼오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동료에게 딸의 수술을 맡기고 대기실에서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린다. 그는 딸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는 몇 시간 동안 15여년의 세월을 거슬러올라가 한 여인과의 첫 만남, 강렬했던 사랑과 그녀에 대한 미안함이 뒤엉킨 과거의 기억을 되짚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불행이 닥쳤을 때, 그 불행의 원인을 자기 자신 속에서 찾으려고 애쓴다. 그 불운이 설령 자기 자신의 행동이나 마음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때에도, 그것을 자신이 의식 혹은 무의식 중에 저지른 어떤 죄와 연관된 벌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띠모떼오의 기억 속에서 그를 죄의식에 빠뜨리는 존재는 이딸리아(페넬로페 크루즈)라는 한 여인이다.

플래시백으로 제시되는 띠모떼오의 기억들은 율리시스의 모험을 떠올리게 한다. 낯선 곳에서 갑작스런 자동차 고장으로 고립된 띠모떼오에게 친절을 베풀며 다가오는 이딸리아는 율리시즈가 대적해야 했던 요물들의 기괴한 외모를 닮았지만, 사이렌의 노래처럼 뿌리칠 수 없는 매혹을 가진 존재이다. 그의 궁색한 변명처럼 더운 여름 연달아 들이켠 보드카 때문인지, 아니면 운명적 이끌림 때문인지 그는 그녀를 강간하고 만다. 그리고 그는 서둘러 범죄 현장인 폐허 같은 그녀의 집을 빠져나가 자신의 일상으로 복귀한다.

띠모떼오에게는 외과의사로의 품위있는 삶에 걸맞은 지적이고 우아한 아내가 있다. 하지만 그는 아이보다는 자신을 삶을 더 중시하고, 파티를 즐기는 부르주아 아내에게 거리감을 느낀다. 그래서 또다시 이딸리아를 찾아간다. 처음에는 돈을 지불하고 성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던 띠모떼오는 점차 이딸리아라는 한 인간에게 사로잡히기 시작한다. 그리고 대조적인 외양만큼이나 다른 삶의 공간 속에 있는 두 여자가 대변하는 양극의 삶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시작한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첫 장면의 전지전능한 시선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분명해진다. 그것은 띠모떼오의 환상이자, 철저하게 그의 관점에서 해석한 신의 섭리이다. 그는 본래 신이 없다고 믿는 인간이었지만,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딸을 앞에 두고 신의 존재를 믿기 시작한다. 딸의 이름인 ‘안젤라’가 강하게 환기시키는 천사의 가호가 그의 삶을 보호한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의 주연이자 감독인 세르지오 카스텔리토는 첫 장면에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 카메라의 움직임이 안젤라의 헬멧을 주우러 내려오는 이딸리아의 손길이라고 설명한다. 이딸리아의 영혼이, 헬멧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아 머리를 다친 띠모떼오의 딸을 구하러 내려와 천사로서의 임무를 완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마지막 장면에서 띠모떼오가 이딸리아가 지상에 남겨두고 간 유일한 유품인 빨간 구두를 다시 땅 위에 놓아둠으로써 하늘과 땅의 조응으로 마무리된다.

감독의 설명에서 눈치챌 수 있듯이 이 영화에는 성서적인 모티브들이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있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십자가의 형상이다. 안젤라가 사고를 당하는 곳도 십자로이며, 띠오떼모가 처음 이딸리아를 강간하게 될 때 기울어져 있었던 십자가는 이후 그의 손에 의해 바로 세워지며 둘의 관계가 폭력에서 사랑으로 전환됨을 알려준다. 그리고 딸의 회복을 기다리며 창밖을 내려다본 띠모떼오가 빨간 구두를 신은 이딸리아의 환영을 보게 되는 것도 역시 병원 안에 있는 십자통로이다.

이 영화의 원제인 “움직이지 마”(Non ti Muovere)는 띠모떼오의 대사로 다른 상황에서 두번 나온다. 그 대사의 첫 번째 수신자는 그의 곁을 떠나려는 이딸리아이고, 또 다른 수신자는 딸의 수술 경과를 그에게 알리려는 간호사이다. 띠모떼오에게 현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움직이는 것, 즉 일상에서의 완전한 이탈은 불행으로의 이행일 뿐이다. 그의 발화는 한번은 수신에 실패하고, 한번은 성공한다. 갑갑하고 지루한 일상 속에서 자꾸만 왜소해졌던 가장 띠모떼오는 율리시스가 결국은 이타카로 귀환하여 왕이 된 것처럼 안전하게 중산층 가정으로 회귀한다. 불행한 개인사와 퇴폐적인 매력을 가진 여인 이딸리아는 결국 가부장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하기 띠모떼오의 방랑을 위한 소모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감독은 자신의 실제 아내인 마거릿 마잔티니의 원작을 영화화하면서 중년 남성의 상처입은 내면을 어떠한 도덕적 판단도 유보한 채 그려내고 싶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정도의 차이만 있지 우린 다 잔인해”라는 대사를 통해 한 남성의 폭력성을 합리화하고, 딸의 회복을 이딸리아의 용서와 사랑으로 치환함으로써 죄의식을 덜어낸다. 그리고 띠모떼오의 아내인 엘자의 내면은 영화 속에서 철저히 외면당한다. 엘자와 이딸리아는 성녀와 창녀라는 이분법적인 도식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으며, 띠모떼오는 그녀들의 욕망에 한번도 귀기울이지 않는다. 그리고 감독은 중산층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 철저하게 희생된 이딸리아를 운명론적 사랑 속에 가둬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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