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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취당하는 어린 노동자의 기나긴 여정의 공포, <올리버 트위스트>

“죽 한 그릇만 더 주세요.” 찰스 디킨즈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은 사람이면 누구나 이 말을 기억하고 또 기다린다. 소년원에서 피죽 한 그릇을 더 얻어먹기 위해 밥그릇을 내미는 올리버 트위스트, 그 소년의 운명적인 모험이 이때부터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은 마치 소공녀 세라가 아버지를 여의고 다락방의 어린 하녀로 전락하는 순간이고,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에 영감을 얻은 작가 쥘 베른이 무인도에 15섯명의 소년들을 한꺼번에 표류시키는 순간이다. 19세기 유럽 문학 속의 소년, 소녀들에게 운명의 격랑은 그때부터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소년, 소녀의 사회학으로서 으뜸가는 것은 역시 <올리버 트위스트>다.

<올리버 트위스트>가 수없이 많은 소년, 소녀들에게 감동적으로 읽힌 것은 우선 그가 겪는 이야기 자체가 결코 누구도 겪고 싶어하지 않는 불운이었기 때문이다. 부모없이 사는 세상은 얼마나 고달픈가? 평범한 아이들은 올리버의 이야기를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편다. 그 공포란 부모없는 세상을 살아갈 때 생길 수 있는 만 가지 불우의 가능성을 추체험으로 느끼게 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안심한다. 그래도 내게는 부모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올리버도 결국은 행복해지지 않았나, 라고.

그러나 질문이 필요하다. 왜 소년, 소녀였을까? 왜 아이들이었을까? 찰스 디킨즈의 <올리버 트위스트>가 좀더 심층적인 소년, 소녀의 사회학으로 보이는 이유, 또는 그 공포가 다른 것에 비해 배가 되었던 이유는 주인공 올리버가 단순히 고아 소년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일을 해야 하는 고아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때는 19세기 유럽이었다. 산업의 굴레가 인간을 잡아가둔 지 얼마 안 되는 시기였다. 말하자면, <올리버 트위스트>의 사회적 기원이 아동 노동력의 착취가 만연하던 19세기 유럽 산업사회에 있었다고 말한다 해도 그건 그다지 과장이 되지 않는다. 올리버는 그냥 아이가 아니라 일하는 아이다. 소년원에 처박히는 그 즉시 그에게 맡겨지는 것은 온통 일감이다. 그는 단돈 몇 파운드에 팔아먹을 수 있는 싸구려 인력이고, 장의사집에 가서도 슬픈 척하고 장례의 맨 앞에 서서 표정을 팔아야 하는 인부일 뿐이다. 런던으로 들어와 소매치기 소굴에 합세한 이후에도 그의 역량은 소매치기의 노동력일 뿐이다.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시시각각 그가 일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니 사실 어린 시절 우리가 느꼈던 안도감은 우리는 부모가 있으니 괜찮다가 아니라, 우리는 부모 밑에 있으므로 착취당하며 일을 해도 되지 않는구나였던 것이다. 올리버는 사회의 떠도는 상징적 ‘산업 도구’였고, 착취당하는 어린 노동자였던 것이다. 영화 속에서도 오직 그를 거둬주는 브라운 로우만이 그에게서 어떤 노동력도 갈취하지 않은 단 한 사람이다. <올리버 트위스트>가 사회를 빗댄 소설에 속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 착취당하는 어린 노동자의 기나긴 여정의 공포를 그렸으며, 그를 둘러싼 폭력의 사회를 다룬 작품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런 전제가 있고 나서야, <올리버 트위스트>의 감독이 로만 폴란스키라는 사실이 비로소 의외가 아닌 것으로 느껴질 것이다.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가 흥미로운 때는 그가 공포와 폭력의 기운에 손을 댈 때이고, 그 공포와 폭력의 기원이 사회의 어딘가에 집단적으로, 그러나 알아차리기 힘든 음모의 형세로 응집해 있을 때다. <로즈마리 베이비>(한국 제목은 <악마의 씨>)와 <차이나타운>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 <악마의 씨>의 악마와 그 광신도들(그것은 끝내 실재의 형상으로 나타나 살인광 찰스 맨슨의 추종자들이 로만 폴란스키의 아내를 살해하는 결말을 낳았다), <차이나타운>이라는 이름 아래 풀리지 않는 범죄적 마성으로 거듭되는 비운의 가족 사회사, 그리고 가장 최근 영화 <피아니스트>의 역사적 죄악의 홀로코스트까지, 그것들은 폭력적이고 공포스러운 인간 사회학의 기원에 그 근거를 맞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폴란스키의 촉수가 <올리버 트위스트>를 감지한 것은 그다지 의외는 아닌 셈이다. 실상 원작 자체가 대단히 무섭고 음산한 폭력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던 탓이다. 그래서인지 폴란스키는 원작의 틀을 크게 벗어나 변형적인 형태로 영화를 완성하고자 원했던 것 같지는 않다. 소년원에서 쫓겨난 올리버(버니 클라크)가 장의사집에 인부로 갔다가, 다시 도망쳐 런던의 소매치기 집단으로 흘러들어가고, 거기에서 올리버를 이용하려는 패긴(벤 킹슬리)과 악당 빌 사이크스(제이미 포어만)를 만나고, 다시 그를 구해주는 브라운 로우를 만나는 것으로 영화는 되도록 충실히 소설의 이야기를 축약하고 있다. 사실, 폴란스키는 이렇게 유명한 원작을 영화로 다시 만들 필요가 있을까 처음에 고민했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데이비드 린의 1948년작 <올리버 트위스트>, 캐롤 리드의 1968년작 뮤지컬 <올리버!> 이후 이 소설을 소재로 한 그렇다 할 영화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말하자면 영화 <올리버 트위스트>는 문학 <올리버 트위스트>를 제대로 옮겨놓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 폴란스키는 원작이 갖고 있는 분위기를 대부분 흡수하고자 한다. 음산한 기운으로 뒤덮여 있는 런던의 야경과 괴물과 사람 그 중간의 형상을 갖춘 반인반마들(특히 벤 킹슬 리가 연기하는 패긴 영감)을 스산한 느낌으로 만들어냈다. 그럼으로써 그것들은 바로 폴란스키의 영화를 곧잘 지배하는 음산함, 그것의 소년·소녀적 버전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폴란스키라는 이름을 앞에 걸고 판단할 때 이 영화를 어떤 야심적인 영화적 성과물로 보기는 힘들다. 폴란스키는 이 영화를 자신의 아이들도 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만들었다고 말하는데(단역으로 자신의 아들과 딸을 출연시키기도 했다), 실상 그런 식의 강박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차라리 흥미로운 점은 영화 자체가 아닌 다른 데 있다. 자기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고전 명작을 선택할 때조차, 어른들에게 홀로코스트를 환기시키듯 아이들에게 무서움을 심어주는 그런 작품을 폴란스키가 골랐다는 점이다. 제 자식에게 보여주고 싶은 영화마저 음산한 폭력의 기원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폴란스키, 그의 그런 영화적 운명이 더 흥미라면 흥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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