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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로 미리 보는 <음란서생> [4] - 저잣거리
김현정 2006-01-04

김대우 감독은 황가(오달수)의 ① 유기전에 유독 애착을 가지고 있다. 유기전은 음란소설을 필사하고 제본하여 대여까지 하는 장소이고,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나며, 모든 사건의 접점을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여인들이 부담없이 찾아올 만한 가게가 필요했다. 포목전도 있었지만 뭔가 반짝거렸으면 해서 유기전을 떠올리게 됐다.” 평민의 가게가 상세한 모양새를 전하지는 못하겠지만, 나무로 짠 선반마다 세월이 느껴지는 유기전은, 방을 지나 또 다른 방이 나타나는 깊이있는 공간이다. 가장 안쪽엔 황가의 본업인 음란서적 제작소가 자리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중에 도서관 지하에 어떤 공간이 있고 그 안에서 열쇠 만드는 노인을 만나게 되는 작품이 있었다. 그렇게 낯선 공간으로 들어가는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걸 다 보여주자니 상영시간이 길어질 것 같았고, 느낌을 살리지 못해 아쉽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유기들은 대부분 손으로 두드린 방짜유기인데, 3t 분량을 선반에 쌓다보니 아무리 쌓아도 끝나지 않더라는 게 소품팀이 전하는 고충이다. 이중 함부로 굴려도 되는 유기는 소품팀이 보유하고 있던 헌 물건. 소품을 빌려준 유기회사가 헌 유기까지 깨끗이 닦아주어 비록 무너지는 선반 위일지라도 한자리 차지할 수 있었다.

이 공간은 세밀한 소품들도 상상으로 채워야 했다. 어느 시대 어느 땅이고 평민들의 생활을 기록하는 데는 인색한 것이 역사가의 습성이기 때문이다. 입구로 들어가 통로를 두번 돌고 문을 열면 나오는 ② 밀실은 모사장이와 필사장이의 작업실이다. 밧줄을 매달아 난잡한 내용이 적힌 한지를 말리고, 좁지만 번듯한 작업대도 있다. 한지를 썰고 가지런히 모아 구멍을 뚫고 끈으로 엮는 도구가 필요했지만 딱히 기록이 없어 그 용도에 맞는 형태로 다시 만들어야 했다. 밀실과 선반 사이엔 윤서와 광헌과 황가가 머리를 맞대고 <흑곡비사> 마케팅 전략을 논의하는 평상이 놓여 있다.

이 유기전은 밖으로 나가면 목조건물이 다닥다닥 붙은 ③ 상점거리의 일부가 된다. <형사 Duelist>의 장터 오픈세트가 있던 자리에 (원래는 썼던 자재를 재활용하려 했지만) 새로 지은 이 거리는 황량한 듯 덧문을 굳게 닫아걸고 있다. 가게의 자재와 형태만 바뀌었을 뿐 현대와 비슷하게 좁고 북적대는 길목이었을 시장을 재해석한 결과다. 조근현 미술감독은 상점거리가 음란서적 제조·유통의 중심지이므로 낮에는 영업을 하지 않는 듯 한적하고 밤에는 조심스럽게 북적거렸으리라 상상했다. “어떻게 하면 그런 분위기가 날까 생각하다가 판자로 덧문을 만들어 닫기로 했다. 사람은 없고 바람이 불면 먼지가 휘날리는, 마치 <석양의 무법자> 같은.” 밤이 되면 그 덧문 사이로 불빛이 새어나오며 새로 나온 음란소설을 찾는 처자들이 남몰래 문을 두드린다.

역사책 변두리에 내쳐진 평민이니 복식 기록인들 온전할 리가 없다. 남아 있는 기록은 대부분 19세기가 넘어 사진기술이 도입된 뒤의 복식. 정경희 의상팀장은 그런 황가에게도 세심하게 배려한 옷을 지어주었다. 사대부가 소맷자락이 넓어 엽전 한 꾸러미도 넣을 수 있는 도포를 입었다면, 평민은 소매와 품을 좁혀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④ 창의를 입었다. 배색을 위해선 쾌자 대신 비슷한 형태의 서민복 배자를 썼다. 처음 정경희 의상팀장은 소설을 만들어 파는 이라기에 “외국 문물도 앞서 받아들이고 돈냄새도 나는 인물”이라 생각해 황금색이 섞인 의상을 생각했다. 그러나 김대우 감독은 황가가 빈약하고 꾀죄죄하기를 원했다. 정경희 의상팀장은 좋은 옷은 입는 사람이 알아본다고 믿어 하층민의 옷이더라도 까다롭게 원단을 골랐고, 남몰래 샤넬 원단을 쓴 적도 있다. 그런 정경희 팀장이 감독의 주문에 맞춰 찾아낸 옷감은 비단이지만 올이 성기고 겉보기엔 거친 느낌도 나는 인도 실크였다. 그나마도 김대우 감독은 화려하다고 생각해 옷감을 비비고 빨아 남루한 느낌이 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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