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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타락하는 누아르의 정신, <야수>
오정연 2006-01-10

비극은 예정되어 있다. 그들이 어떤 꿈을 품고 살아왔든, 어떤 미래를 바라건 결론은 바뀌지 않는다. 그 꿈이 당연하고 그 미래가 소박할수록, 이들이 맞닥뜨릴 불행은 더욱 절절해질 뿐이다. 쫓는 형사인지, 쫓기는 범인인지 구분할 수 없는 장도영(권상우)의 피투성이 얼굴로 영화의 결말을 화면 가득 담으며 시작하는 <야수>는 그렇게 선언한다. 대담무쌍한 스포일러성 문구를 처음부터 늘어놓을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세 남자의 파국을 그저 지켜봐야 하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저마다 뜨거웠던 그들이 가슴속에 품었던 바람이다. 그 바람은 그들의 행동을 결정하고, 그 모든 행동은 다시 예정된 결말로 향하는 길의 빛깔을 의미할 것이다.

남들처럼 행복하게 사는 것이 유일한 삶의 목표였던 장도영은 물불 가리지 않고 목표물을 향해 질주한다. 그는 도심 한복판의 아찔한 역주행도 불사하고, 갑작스레 상대가 휘두르는 칼에도 물러서지 않는 열혈형사다. 홀어머니는 병석에서 삶을 마감 중이고, 배다른 동생은 쉽게 돈을 벌겠다는 헛된 꿈에 눈이 멀었다. 장도영을 포효하게 만든 것은,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거대 폭력조직에 이용당한 뒤 무참히 버려진 동생의 죽음. 그는 동생이 지닌 대박의 꿈을 떠올리며 복권을 사던 중 코앞에서 동생이 살해당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상처입고, 그만하라 충고하고 싶을 정도로 홀로 애쓰는 장도영의 모습은 그물에 갇힌 야수를 연상시킨다. 사실 그는 누아르영화의 무심한 듯 강인한 주인공보다는 신파영화 속 연약한 마초에 가깝다. 그의 간절하고 소박한 소망과 진심을 담은 눈물은 너무 일찍, 그리고 너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따뜻하게 손 한번 잡아주지 못한 이를 향해 제대로 된 프러포즈도 할 줄 모르는 그의 투박함은, 때로 자연스런 유머를 선사하기도 한다.

저돌적인 배우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된 장도영이 권상우에게 제법 잘 어울리는 옷이라면, 악을 향한 동물적 증오를 감추지 않으면서도 법과 원칙을 우선시하는 검사 오진우의 전반부는 흐트러짐 없는 유지태의 이미지를 변주한 셈이다. ‘피를 하나라도 더 뽑아야 이삭 한알이 더 여문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읊조리며 무조건적인 정의를 꿈꾸는 오진우의 모습도 딱하긴 매한가지다. 서류더미에 코를 박아도 중요한 용의자와 증언자는 윗선을 통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리고, 차라리 장도영처럼 앞뒤없이 치받는 편이 속편하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그의 냉철한 이성은 서서히 무너진다. 장도영의 저돌성과 솔직함을 신뢰하여 수사에 끌어들인 그 역시 야수의 본성을 되찾게 된 것. <올드보이>에서 선보였던 유지태의 얄미운 침착함이 까칠한 수염 속에 자취를 감추고, 오진우가 영화의 마지막 파국을 책임지게 되는 일련의 과정은 누아르의 주인공으로 제격이다. 전반부에 그가 엿보인 신념은 다소 밋밋하고 애매했지만, 자신이 믿던 정의가 모호해짐에 따라 점차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들며 장도영의 분노를 그대로 닮아가는 모습은 꽤나 애틋하다.

그러나 명백하게 대립하는 캐릭터를 연기한 두 젊은 배우에게서 때때로 엿보이는 불안한 연기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은, 구룡파 보스를 연기한 손병호다. 어두운 과거를 청산한 뒤 사회사업가로 변신하여 정계 진출을 노리는 거물급 폭력조직 두목, 유강진. 가족에게는 한없이 믿음직스러운 가장이지만, 기실 그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상태에서 아찔한 곡예를 감수해야 하는 외로운 존재다. 멈추면 끝장이라는 위기의식이 그를 움직이는 추진력이다. 오진우에게 유강진은 아무리 애를 써도 뽑아버릴 수 없는 절대악일지 몰라도, 그 역시 처음부터 야수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려울 땐 그의 손을 빌리다가도 공천에 난색을 표하는 정치인들의 기름진 얼굴에 비하면, 국회의사당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의 뒷모습은 때로 숙연하다. 끝까지 믿고 싶었던 죽마고우를 직접 내치는 순간의 흔들리는 눈빛은, 악순환을 멈출 수 없도록 내몰린 이의 그것이다. 앞선 두 인물과 조화를 이룰 정도의 비중이 주어졌다면 콜레오네 가문의 남자들(<대부>) 못잖은 매력을 발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는 우리 사회의 속물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인물이 아닌가. 그 캐릭터의 전형성과 디테일 부족이 못내 안타까운 것은 그 때문이다.

입 밖에 내어 말하면 참으로 당연한 세 남자의 욕망은 그다지 새롭지 않다. 분명하게 구분됐던 선과 악이 영화 속에서 조금씩 몸을 섞는 과정 역시 익숙하다. 길지 않은 러닝타임이 부담스럽다면 이는 <야수>가 장르의 전형성을 피하려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묵직하고 출구없는 파국은 아무래도 답답하게 마련이니까. 그러나 권상우가 온몸을 던져 분투한 액션신들은 애초 목표로 했던 투박한 질감을 그대로 살렸고, 가와이 겐지(<공각기동대> <칠검> <남극일기>)의 음악은 긴장을 조이고 풀어주면서 장르영화를 훌륭하게 마무리한다. 대부분의 구성요소들이 영화의 처절한 기조를 방해하지 않는 가운데 문제가 되는 것은, 과감한 줌인과 줌인트랙아웃, 거친 핸드헬드, 긴박한 화면분할 편집 등의 자잘한 비주얼적 시도들이다. 눈길은 끌지만 정확하게 영화와 조우하지 못하는 세련됨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세상의 끝처럼 아득하고 허탈한 그 옥상에서 유강진을 맞닥뜨린 오진우가 묻는다. “왜 그랬어.” 딱히 대답을 구하는 것도 아닌 이 대사는, 동일한 액션누아르 장르를 표방했던 <달콤한 인생>에서 김선우가 강 사장에게 던졌던 질문과 묘한 대구를 이룬다. <달콤한 인생>의 경우, 대답을 갈구하는 인물의 절절함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걸었던 싸움의 끝에서 던진 오진우의 한마디는 언뜻 논리적이진 않지만, 그 절박함은 가슴을 친다. <달콤한 인생>이 화려한 미술과 매끄러운 스타일로 누아르를 완성했다면, <야수>가 내세우는 것은 거침없이 타락하는 누아르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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