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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로, 아래로, 한없이 굴러떨어지는 삶, <천상의 소녀>
김현정 2006-02-01

하늘색 부르카를 뒤집어쓴 여인 수십명이 카불 거리를 행진한다. 모두 과부인 그들은 “우리는 정치는 모른다”면서 다만 일을 하고 싶다고, 배가 고프다고 소리치지만, 최루탄과 물대포에 쫓겨 철망 안에 갇히고 만다. 눈동자조차 드러내지 못하는, 맨손의 여인들.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이 시위 장면은 탈레반 정권 치하 아프가니스탄이 문자 그대로 지옥일 수밖에 없었던 여인들의 처지를 직설적으로 보여주고, 그 지옥을 짊어진 한 소녀의 삶으로 넘어간다. <천상의 소녀>는 픽션이라 해도 픽션일 수가 없는 영화다. 여자는 일을 해서는 안 되고 혼자서는 밖에 나갈 수도 없는 탈레반의 규율. 그것은 자유라는 말조차 사치스러운,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열두살 소녀 레일라(마리나 골바하리)는 어머니(주바이다 사하르), 할머니와 살고 있다. 아버지는 카불 전쟁에서 죽었고 외삼촌은 러시아 전쟁에서 죽었기 때문에 집안엔 남자가 한명도 없다. 어머니가 몰래 일하던 병원이 넉달 밀린 월급도 주지 않고 문을 닫던 날, 할머니는 레일라의 머리카락을 자르며 “네가 일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굶어죽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남자아이처럼 가슴이 판판한 어린 레일라는 일자리 구하기도 쉽지 않다. 아버지의 전우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돈 대신 먹을 것을 받고 일하던 레일라는 아이들을 탈레반 전사로 키우려는 이들에게 붙들려가 강제로 코란을 외우고 군사훈련을 받는 학교에 다니게 된다.

이 영화의 원제는 <오사마>다. 이름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레일라가 성별을 의심하는 학교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곤란에 처하자 그녀를 좋아하는 듯한 고아소년 에스판디가 “그애 이름은 오사마”라며 감싸준 데서 나온 제목이다. 그러므로 <천상의 소녀>는 아버지 옷을 줄여 입은 소녀가 씩씩하게 세상을 헤쳐나가는 모험담과는 거리가 먼 영화일 것이다. 높고 가는 여자아이의 목소리 그대로 남자아이들 한복판에 던져진 레일라는 언제나 겁에 질려 있다. 남자아이인 척 올라간 둥치에서 내려오지 못해 울먹이고 우물 속에 매달려 엄마 어디 있느냐고 애처롭게 통곡을 한다. 이 아이의 삶은 한발만 잘못 디뎌도 저승으로 떨어지는 지뢰밭과 같다.

감독 세디그 바르막은 애초 남자아이를 찾고 있었지만 거리에서 구걸하던 어린 소녀 마리나 골바하리를 보고 그 눈동자에 끌려 캐스팅하게 됐다. 폭격으로 언니를 잃었다는 마리나는 가난과 공포를 눈동자뿐만 아니라 존재 그 자체에 담고 있다. 탈레반이 자신을 쫓아오지 않을까,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에스판디가 빵을 빼앗아가지 않을까. 마리나는 조급한 발걸음과 흠칫 뒤를 돌아보는 어깨선으로 걸음걸음이 함정이고 덫이 되는 위태로운 일상을 드러낸다. 탈레반 정권 붕괴 이후 첫 번째 장편 극영화인 <천상의 소녀>는 당연하게도 픽션이고 드라마틱한 사건들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그 극적인 긴장은, 아마추어 배우인 마리나의 연기에서 확인할 수 있듯, 현실을 수집한 데서 나온 것이다. 알라가 탈레반을 지옥에 떨어뜨리기를 기원하는 여인들의 노래와 춤, 빗장을 지른 대문 안에 갇혀 족쇄를 차고 남편이 죽을 날만 기다리며 살아가는 아내들, 증인이나 판사도 없이 즉결재판에 처해져 생매장당하거나 총살당하는 죄수들. 그 지독한 풍경은 먼지처럼 건조하지만 피바다보다도 참혹하다.

영화제작을 금지한 탈레반 정권을 피해 파키스탄으로 망명했던 바르막은 어린 여자아이가 학교에 가고 싶어 남장을 했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천상의 소녀>를 떠올렸다. 그러나 레일라는 남장을 하고 싶지 않다. 들키면 죽기 때문이다. 땋은 채로 자른 머리 타래를 화분에 심고, 다 쓰고난 링거 호스를 기울여 몸에 좋다는 약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리는 레일라. 그리고 과부들의 시위 현장과 죄없는 여인들이 갇힌 감옥에서 줄넘기를 하는 환상을 보는 레일라. <천상의 소녀>는 다시는 엄마와 할머니를 만나지 못할 이 어린아이에게 차라리 죽음이 나을지도 모르는 형벌을 부과하고 끝나버린다. 조금의 틈새라도 보인다면 희망이 있다고 우겨볼 만도 하다. <천상의 소녀>가 희망의 단서라도 구겨넣지 못하는 까닭은 무력한 소녀에게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탈출구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느 길로 가더라도 그 끝은 봉쇄된 비극이다.

<천상의 소녀>는 제작을 도운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영화들처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어도 그 무게를 가늠하기 어려운 비극을 찾아내곤 한다. 돈이 없어 문을 닫게 된 병원. 짧고 뒤틀린 다리를 가진 어린아이가 모두들 서둘러 떠나버리는 병원 복도를 홀로 뒤뚱거리며 걸어간다. 소음은 사라지고 아이는 걷는다. 바르막은 뷰파인더로 그 장면을 바라보며 오래 울었다고 한다. 누구도 돌봐주지 않을 그 아이의 다리는 분장이 아닌 진짜고,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천상의 소녀>를 보는 관객은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래로, 아래로, 한없이 굴러떨어지는 삶. <천상의 소녀>는 단지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을 먼 땅의 현실을, 담담하나 분명하게 세상에 알리지만, 또한 무력하기도 하다. 그것이 탈레반 정권 치하의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바르막은 탈레반 정권이 몰락한 뒤에도 아프가니스탄은 참혹하다고 말했다. 2005년 <천상의 소녀>에 골든 글로브 외국어상을 건넨 이들은 오사마 빈 라덴을 비호한 탈레반 정권의 만행에 분노했을 테지만, 그 주체가 탈레반 정권이었기 때문에, 환호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탈레반 지도자를 찾겠다며 민간인들이 사는 마을에 정교한 폭격을 퍼붓는 국가가 수여한 트로피는, 영화 자체를 뒤흔들지는 않는다 해도, 고맙게 받아들일 선물은 아닌 듯하다. <천상의 소녀>는 “잊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용서할 수는 있다”는 넬슨 만델라의 경구를 자막에 새기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 경구를 고스란히 잊고, 빈대잡자고 초가삼간 불태우는 이들 앞에서, <천상의 소녀>가 조금 더 가엾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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