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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각종 일본영화상을 휩쓴 <박치기!>의 이즈쓰 가즈유키 감독
김수경 2006-02-10

키네마준보, 마이니치 영화콩쿠르, 블루리본이 한목소리로 선택한 2005년의 일본영화는 <박치기!>다. 각종 영화제의 작품상과 감독상을 휩쓸고 있는 <박치기!>의 이즈쓰 가즈유키 감독은 독설가로 명성이 높다. TV에서 영화를 소개할 때마다 “저질, 최악”이라는 단어를 서슴지 않는 그가 자신의 신작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고등학교 시절 영화동아리를 만들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학원분쟁을 소재로 한 영화를 찍었고 <아이들의 제국>과 <키시와다 소년우연대>처럼 성장기 소년 소녀에 집중했던 이력, <임진강>을 들으며 자란 나라 출생인 것을 감안할 때 이즈쓰 가즈유키에게 <박치기!>는 각별할 수밖에 없다. 현해탄 건너편의 그와 주고받은 <박치기!>와 재일조선인에 관한 서면 인터뷰.

-당신은 핑크무비로 영화를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구로사와 기요시, 수오 마사유키, 오스기 렌, 에모토 아키라 등 수많은 일본 영화인들이 당신처럼 영화를 시작했는데 그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부탁한다. 당시에는 어떤 심정이었나. =하루빨리 넓은 바다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떻게든 일반 영화를 찍고 싶었는데 당시에는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마땅한 수단이 없었다. 1975년 핑크영화 <간다, 간다 마이트가이>로 데뷔한 뒤 묵묵히 경력을 쌓다가 1980년 데뷔작 <아이들의 제국>을 찍었다.

-당신은 평론가로도 활발히 활동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창작자(감독)와 비평가를 겸하기 때문에 갖는 장단점에 대해 설명을 부탁한다. =특별한 장점이나 단점은 없다. 그리고 나는 평론가가 아니다. 내가 방송에서 영화를 소개하는 일은 그 영화의 특성을 이야기하는 정도이다. 덧붙이면 개별 작품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요소나 그 영화의 관점을 설명할 따름이다. 굳이 말하자면 텔레비전을 무대로 영화와 놀고 있는 것이라고 할까. (웃음)

-나라 출신인 당신이 교토를 배경으로 한 <박치기!>를 만든 일은 매우 자연스러워 보인다. 1968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므로 원작자 마쓰야마 다케시처럼 당신도 고등학생이었을 텐데 당신이 기억하는 그 시절의 실제 상황은 어떠했나. =전세계가 불타는 시대였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간사이 지방에서도 정치·사회적으로 큰 파고가 일었다. 나는 당시 아직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러한 세계와 일본의 역동성을 신문으로 보고 느끼기만 했던 아이에 불과했다.

-<박치기!>에서도 짙게 반영되는 대한민국, 북한, 일본이 가진 정치·문화적 관계에 대한 개인적 견해가 궁금하다. =현재는 상당히 이상한 삼각관계다. 삼국의 문제는 극동아시아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안이다. 전쟁은 끝났다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당시 상황은 변하지 않았고 우리는 그 자리에 남겨져 있다. 일본이 미국만 바라보지 말고 한국, 북한을 포함한 삼국에 대한 실질적인 고민을 해야 한다. 그래서 제로에서 다시 시작했으면 한다. 일본은 가여운 과거에만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 된다. 아직도 표면적이고 일방적인 외교를 고수하는 일본은 한국의 북한에 대한 햇빛정책에도 전혀 동참하지 못하고 있다. 서로를 인정하고 상대에 대한 이야기를 확인하면서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게 바로 젊은 세대다.

-<박치기!>에서 안성, 방호, 재덕은 조선인임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냉대받고 머리가 터지도록 싸워야 한다. 1세대가 아니라 실제 조국을 경험하지도 못한 그들이 그럼에도 자신의 조국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민족교육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조선인학교는 자기 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했다. 전후 일본의 조선인 사회에서는 그렇게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을 강화하자는 운동이 있었다. 물론 그렇지 못한 환경에 처한 사람도 있었다. 그것이 <박치기!>에서는 주인공 안성이 조국의 축구국가 선수가 되겠다는 의지로 발전한다.

-<박치기!>에서는 노래 <임진강>과 경자의 플루트 연주로 대표되는 음악이 매우 구체적인 매개물로 작용한다. 한편 축구는 하나의 상징이나 이데아처럼 스쳐 지나간다. 축구선수인 안성이 월드컵을 꿈꾸는 점을 감안하면 단순한 배경으로 보긴 어렵다. 이 점에 대해서 설명을 부탁한다. =원래 노래 <임진강>을 테마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 그 강을 뛰어넘을 것인가 하는 것이 <박치기!>의 테마다. 축구에 관해서는 영화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면 또 다른 주제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은 <박치기!>와는 또 다른 이야기다.

-젊은 일본 감독이나 배우 중에서 장래가 기대되거나 현재 주목하고 있는 후배가 있다면 누구인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일본에서는 현재의 일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영상으로 이야기하는 작가가 적다. 영화를 봐도 일본이 어떤 나라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작가다운 작가나 영상시인으로서의 작가가 줄어들었다. 그나마 사카모토 준지, 마쓰오카 조지 등이 그런 방향으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작품 내적으로는 합당하다고 여겨지지만 한국 관객은 <박치기!>의 주인공들이 사용하는 조선어에 낯설어할 것 같다. <박치기!> 제작 당시 조선어가 가능한 재일 조선인이나 한국인 배우를 주연급으로 기용할 생각은 없었나. =<박치기!>에는 동포배우도 출연하지만 메인이 아니다. 우연히 그렇게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극중에 사용되는 한국어는 그 지역사회를 배경으로 한 한국어다. 현재의 한국어와는 차이가 있고 일본어와 혼성된 혼합어라 할 수 있다. 현재 한국의 언어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역으로 그 차이점을 관객이 느껴줬으면 좋겠다.

-이제까지 만든 당신의 전작 중에서 개인적으로 애착이 가거나 흡족한 작품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그에 대한 이유도 설명해주기를 바란다. =특별히 없다. 전부 불만족스럽다. <박치기!>도 90점 정도라고 할까. 만족이란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영화감독이 자신의 작품에 만족한다면 다음 작품을 찍을 수가 없다. 항상 부족하기 때문에 다음 작품을 찍는 것이다. 감독이란 원래 그런 직업이다.

-당신은 현장에서 매우 엄격하고 불같은 감독으로 유명하다. 젊은 배우가 많았던 <박치기!>에서는 어떠했나? 사와지리 에리카는 한번도 혼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그 이유가 궁금하다. 반대로 가장 많이 혼난 배우가 있다면. =여배우한테는 엄격하지 않다. 여배우에게는 늘 얌전히 대한다. 왜냐하면 여배우에게 엄격히 행동하는 일은 아무런 이득이 없기 때문이다. 여자와 아이에게 얌전히 대하는 것은 인생의 순리이자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다. 대신 남자에게는 엄격하게 한다. 촬영현장에서도 남자한테는 항상 욕을 하는 편이다. 그것도 세상의 이치니까.

-지나간 과거와 역사를 되돌아보며 자유와 평화를 갈구하는 젊은이들을 다룬 <박치기!>가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진심은 무엇인가. =전쟁과 평화를 보여주고 싶었다. 인간은 원래 끊임없이 전쟁을 하면서도 평화를 원한다. 나는 애국심을 표현하고 싶지 않았다. 나라를 지키거나 부자가 되는 방법도 그려내지 않는다. 뭔가에 동화하거나 오랫동안 집착하는 일도 내세우지 않는다. 다만 그러한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삶의 과정에서도 살아남는 것이 ‘신뢰’인 것 같다.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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