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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란서생> 미리 보기 [2]

후반작업 중인 김대우 감독 인터뷰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 결국 인생은 등가다”

음악을 믹싱하고 있던 도중에 만난 김대우 감독은 매우 피곤했던지 왼쪽 눈의 쌍꺼풀이 풀려 있었다. <송어> <정사> <반칙왕> 등의 시나리오를 썼지만, 지금은 마흔다섯살 먹은 신인인 김대우 감독. 개봉을 보름 남겨놓은 그의 마음은 기대와 근심 사이를 바쁘게 오가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김대우 감독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걱정하지만 이미 한 일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첫 번째 연출작으로 사극을 택했다. 신경써야 할 부분이 많았을 텐데 굳이 어려운 장르를 택한 까닭이 무엇이었나. =만만히 본 거지. (웃음) 시나리오를 쓰면서 스케일과 장소 문제를 철저하게 통제했다고 생각했고, <음란서생>의 장르가 애매하다는 점도 도움이 됐다. <음란서생>은 왕의 옆에는 항상 누가 서 있어야 하는데 그 사람 어디 갔냐고 따지면, 잠깐 나갔나 보지, 이렇게 답해도 되는 영화다. 정작 문제는 물리적인 것이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는 톤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야 하는데 설명을 제대로 못했다. 지금까지는 작가여서 주로 듣는 입장이었으니까.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다가 늦은 나이에 감독이 됐다. 결심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 =말리는 사람이 많았다. 작가로서 어려운 입장도 아니고, 그만큼 되기까지 행운도 따라주었던 건데, 다시 시작하면 그런 행운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들 했다. 흔히 짐작하는 것처럼 내 시나리오로 만든 영화에 불만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내가 감독이 된 건 삶의 유한성이랄까, 소멸이랄까, 거기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다. 마지막까지 좀더 나은 자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사>를 썼을 때도 노쇠와 소멸을 이야기했었다. 그런 걸 생각하기엔 젊은 나이가 아니었는지. =약간 노인 같은 소리를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인생이 한번 돌아 다른 굽이로 접어드는 시기였던 듯하다. 나는 미술이건 음악이건 인간이 만든 창작물에 품위를 부여하는 건 유한성에 대한 그 무엇이라고 믿는다. 유한성에 대한 불안, 유한성에 대한 자각처럼. 프랑스 문화원에서 영화를 보고 나와 경복궁 길을 걷던 젊은 시절부터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를 느꼈었다. 그 또한 비슷한 것이었고 그래서 영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아이러니다. 젊은 시절엔 가까운 노쇠보다 멀리 있는 소멸이 먼저 다가왔다.

-<음란서생>을 쓸 무렵엔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있었나. =두세 가지 생각이 둥둥 떠다녔던 것 같다. 하나는 행복이 무엇일까, 다른 하나는 서로 사랑이라 부르는 무언가가 되게 기묘하다는 생각이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상대도 그를 사랑하면 그 감정은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상대가 그를 싫어하면 이 사람의 사랑은 집착이나 스토킹이라 해야 하는 건가. 사랑하는 건 똑같은데 말이다. 사랑은 수십 가지 관계의 변수가 생길 수 있고 개인적이며 자신의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은 어떤 게 나을까라는 의문도 있었었다. 정신이 일치되는 행복을 찰나적으로 느끼고 그 이후 무미건조한 삶이 이어지는 것과 어느 정도의 행복이 길게 이어지는 것. 두 가지 중 어떤 게 좋을까라는 생각을 그 무렵 하고 있었다.

-윤서가 음란소설을 쓰는 계기는 사랑에 빠지는 것과도 비슷하다. 설명이나 이유가 없고 순식간이다. =내레이션을 쓴다거나 하여 설명을 붙일 수도 있었지만 내가 그런 걸 싫어한다.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내 경우엔, 한순간이다. 윤서가 음란소설을 처음 보았을 때 음부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그는 그런 단어가 있다는 건 알았겠지만 그걸 소리내어 읽고 그게 실재한다는 걸 깨달으며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거다. 사마귀나 딱지가 떨어지는 듯한 쾌감이랄까. 윤서는 무언가 툭 하고 떨어지는 그 느낌 때문에 음란소설을 좋아하게 된다.

-<반칙왕>의 대호(송강호)가 프로레슬링을 만나 행복해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는 무언가 가짐으로써 잃기도 한다는 것에 대한 개념이 약했다. 무얼 얻으면 그건 추가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이 뭔가 얻으면 잃고, 결국 인생은 등가가 된다는 걸 깨닫게 됐다. <음란서생>의 테마는 행복이었다. 가지는 순간, 몰두하는 순간, 그로 인해 무언가 잃어버리게 되어 후회하는 마음, 그래도 그때 좋았잖아라고 말할 수 있는 태도를 그리고 싶었다. 어떻게 보면 되게 부질없다. 한때 행복했다 해도, 지나고 나면 그때 그런 순간이 있었던가 실재했던가, 하는 불확실성이 다가오지 않나.

-윤서와 광헌은 모두 음부라는 단어에 소스라치지만 그들이 새로 시작하는 지점도 그 단어다. 작가로서 당신은 단어가 가지는 의미의 중심에 접근하려는 타입이 아닌가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보다는 단어의 이면이라고 할까. 흔히 쓰는 단어라고 해도 숨겨진 기괴함이나 저력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거기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그 단어만을 홀로 불러내어 숨어 있는 걸 불러주면 그 이면이 살아난다. 혹은 혼자 있는 단어를 다른 단어와 합쳐놓으면 기괴함이 드러나기도 한다. 나는 그 기괴함이나 힘에 집중하곤 그걸 자꾸 찾고 싶은데 그게 참 어렵다. 사전을 찾아야 하는 새로운 단어는 오히려 쓰지 않는 편이다. 내 제자가 <쉬리>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를 가져오면 우선 한대 맞고 시작할 거다. 이게 무슨 뜻이냐고. 내 편견이 잘못됐다는 걸 증명하는 대표적인 예인 거지. (웃음) 그런데 ‘서생’도 흔히 쓰는 단어는 아니어서 지금도 이 영화가 <음란선생>인 줄 아는 사람이 있다. (웃음)

-윤서가 글에 “잰 체하는 구석이” 있다는 황가의 말에 상처받거나 작가는 이런 거 써야 한다며 색안경을 선물받고 흐뭇해하는 장면에는 작가로서 당신의 느낌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작가들은 다 그런 거다. 감옥에서 나온 남자가 착하게 살아보려고 애쓰지만 사회의 편견 때문에 또다시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들어가고 면회 온 아들에게 이번엔 정말 다르게 살겠다고 약속한다… 뭐 이런 이야기만 평생 썼던 작가라 해도, 작가는 모두 등껍질 없는 거북이다. 손가락으로 살짝만 긁어도 피가 난다. 7, 8년 전에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다가 표정이 살짝 변했던 적이 있다. 그 사람이 그걸 잊지 못하고 있다가 “그때 김 작가가 나 경멸했잖아. 표정이 변하던데”라고 하더라고. (웃음) 윤서는 정4품 사헌부 장령인데 이게 나름대로 높은 벼슬이다. 그런데 그는 관직보다도 누군가가 작가라고 불러주는 게 좋은 거다. 나도 김유진 감독님이 처음 작가라고 불러주었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작가, 작가… 이 소리가 계속 맴돌았다. (웃음)

-시나리오보다 멜로의 느낌이 강해졌다. 특히 마지막을 많이 손본 것 같던데. =웃기다가 무섭자, 이런 느낌으로 시작했다가, 웃기다가 슬프자가 된 것 같다. 편집을 하며 많은 에피소드 중에서 선택을 해야 했는데 감정선을 분명하게 살려주는 부분을 중심으로 끌고 갔다. 처음엔 여러 가지를 다 보듬어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합창 같은 분위기를 내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멜로가 강해졌다. 영화를 찍다보니 내 마음이 그쪽으로 간 탓도 있다.

-은근히 말꼬리를 흐리며 삼키는 듯한 대사가 독특했고, 말을 주고받는 느낌도 좋았다. 사극이어서 대화를 만드는 데 제약을 느끼지 않았는가. =사극이라는 게 결국 같은 사안을 어떻게 달리 말하느냐의 재미일 수 있다. 사극은 누군가가 먼저 말을 하면 상대방이 그 말의 뒷머리를 받아 대답하는 앞머리를 어떻게 날리는가를 두고 기교를 다투게 된다. 흔히 ‘조선체’라고 부르는 사극체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정말 조선시대 어투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 점에선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음란서생> 시나리오는 황가가 존대를 하지 않아 우려를 많이 샀다. 심지어 황가(오달수)도 나에게 이래도 되는지 물었을 정도니까. 하지만 조선시대엔 반상의 구분이 너무 엄격했기 때문에 말을 할 때는 엄하게 따지지 않았을 것 같았다. 계급에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면 너그러워지지 않겠는가. 나는 어미를 매우 중요하게 여겨서 배우들에게 어미를 바꾸지 못하게 했다. 처음에 몇번 바꾸기에, 직접 말하기는 뭣하고, 연출부를 시켜서 “저, 선배님, …인데로 끝나거든요”라고 말하라고 시켰다. (웃음)

-윤서는 영화 끝부분에 이르러 욕정인지 사랑인지 모르겠어, 사랑이라 말하지 못했다고 한다. 진짜 그런가. =욕정과 사랑을 구분한다고 말하는 남자가 있다면 질이 안 좋은 놈이다. (웃음) 욕정과 사랑은 구분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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