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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괴물은 되지 말자
이종도 2006-02-24

병은 메신저다. 코 속에 혹이 자랐다. 심한 기침으로 잠을 잘 수 없었다. 병들은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처럼 합창을 했다(<마이티 아프로디테>). “이봐, 직장 다니며 영화를 만드는 건 네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라구.”

3차까지 간 경선이 끝나고 연출을 하기로 결정된 순간 몸의 기는 ‘엥꼬’가 났는데, 새벽 5시까지 마시곤 8시에 일어나 시나리오까지 고치는 주접을 떨다보니 내 몸이 달라져 있었다. 에너자이저인 줄 알았는데, 얼마 없는 상처를 후벼파고 남의 상상력을 훔쳐서 간신히 먹고사는 월급쟁이였다.

그런데 쉴 수가 없었다. 막연한 시나리오를 촬영 가능한 시나리오로 바꿔야 했다. 스탭들이 지적한 문제점들도 풀어야 했다. 설 연휴 내내 시나리오를 고치고, 촬영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쌓아놓은 DVD들을 보느라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불면증까지 슬그머니 내방했다. 미제 수면제를 먹으며 촬영한다는 어느 감독의 심정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쉴새없이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식욕이 없어졌고 대장은 예민해졌다. 앞이 캄캄했다. 정말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촬영 기간 동안 눈이 먼 감독의 처지가 남 얘기가 아니었다(<헐리우드 엔딩>).

시나리오가 확정되고 콘티를 짜고서야 병이 철군을 시작했다. 연기 리허설과 촬영은 그에 비하면 소풍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체면이 있는지 병은 전면 철수는 하지 않은 채 몸에 상주군을 남겨두었다. <신성일의 행방불명>을 보러 갔다가 필름포럼 극장 엘리베이터에 혼자 갇히기까지 했다(그건 영화가 내게 보낸 답장 같았다. 찍지 마라 말이야). 갇히고 나서 폐쇄공포증과 어지럼증이 생겼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기싸움에서 그냥 밀릴 수 없잖아? 나는 더 많은 담배와 술로 대응했다. 자폭이라면 내 전공이라구. 어, 너 병이야? 나 니코틴에 알코올 중독이야.

렌즈 뚜껑을 여니 예상치 못한 변수들의 종합선물세트가 나왔다. 여러 사람들 마음을 일일이 헤아리느라(그 과목은 들은 바 없었다) 여러 개의 가면을 급조해서 써야 했다. 누군가가 불만을 말하면 그 불만은 꿈에서 영화화되었다. 냉정한 척, 대범한 척, 예의바른 척 몇겹 가면을 쓰고 있자니 얼굴 근육이 늘어졌다. 스탭들을 다독이느라 우정과 정치 사이에서 줄타기도 해야 했는데, 삐끗하는 순간 하혈이라도 할 것 같았다. 촬영을 하고 난 밤에는 촬영하지 못한 장면을 찍는 꿈을 꾸었다.

수천 가지의 최종적인 판단을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마구잡이로 내려야 했다. 거기는 가족이나 친구가 내미는 따스한 위로의 손길이 닿지 않는 오지였다. 뭔가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내벽을 미친 듯이 깎아내거나, 남들을 마구 상처주며 몰아붙이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한다. 조금의 잡음도 안 만들려고 하는 소심함 또는 상처를 안 받으려 기를 쓰는 새가슴으로는 그 오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인간 되기 힘드니 괴물이라도 되자는 얘긴가, 그럼? 모든 이를 상처주고서라도 끌고 나가든지, 그들의 상처를 다 합한 만큼 스스로 상처를 주면서라도 끌고 나가든지. 언제나 그렇듯이, 중간지대엔 해답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