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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의 묘(妙)에 매료된 코미디, <달콤, 살벌한 연인>
김혜리 2006-04-04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1999년, 손재곤 감독은 끼니를 줄여 마련한 35만원으로 디지털비디오영화 <너무 많이 본 남자>를 찍었다. 살인 증거가 녹화된 채 반납된 테이프를 찾아내기 위해 동네 대여점의 비디오를 모조리 빌려보던 범인이 히치콕에 감화되어 졸지에 감독지망생으로 변모한다는 미담(?)이었다. 한겨레 영화학교 동기들과 만든 <너무 많이 본 남자>는 52분 러닝타임이 너무 길어 애초 목표한 ‘십만원영화제’에 출품도 못했다. 그런데 “엄청나게 재미있다”는 소문이 후원자를 불러모아 속편 <감독 허치국>이 만들어졌다. 제작비는 500만원, 길이는 60분이었다. 이후 감독은 방송 코미디 대본을 의뢰받았고 2002년에는 <재밌는 영화> 각본을 썼다. 그러니까 영화를 너무 많이 보고, 히치콕 감독을 숭배하던 청년이,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 역량을 공인받았다는 미담(!)이다. HD영화 <달콤, 살벌한 연인>은 손재곤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이다. 감독의 표현을 빌리면 “오랫동안 스릴러영화만을 준비해오던 감독이 로맨틱코미디를 만들었을 때 나올 수 있는 영화”이고 “멜로, 스릴러, 코미디 세 장르를 7천원에 볼 수 있는 영화"다. <달콤, 살벌한 연인>은 쉼표까지 동원해 두 형용사를 비끄러맨 제목이 천명하듯 유머와 스릴이라는 감독의 두 가지 장기를 욕심껏 눌러 담은 작품번호 1번이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황대우(박용우)는 서른이 넘도록 연애를 못 해봤다. 문학 전집이 가지런히 꽂힌 그의 책장 뒤에는 <진도희 베스트>를 비롯한 성애물 비디오와 잡지더미가 웅크리고 있다. 혈액형과 별자리를 빼면 화제가 없는 여자들을 경멸하는 대우는 여성혐오주의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미움은 실상 두려움이다. 여자에게 선택받지 못할까봐, 버림받을까봐 대우는 겁낸다. 두려움은 여자들 앞에 선 그를 경직시키고 이따금 유치하게 만든다(얼마나 유치하냐면 “그래, 나 유치해서 유치원 다녔고 유치하다고 유치장 갈 뻔했고 시인 유치환이랑 극작가 유치진 좋아한다”고 악을 쓸 정도로 유치하다). 대우의 삶은 오랫동안 달콤할 것도 살벌할 것도 없었다. 이웃에 이사 온 미나(최강희)가 그의 발작적인 데이트 신청을 받아줄 때까지는. 이탈리아 유학을 준비하는 미술학도라고 자신을 소개한 미나는 벽장 속에 뭔가를 감춰놓고 있는 듯한 눈빛의 여자다. 문제는 감춘 물건이 시체라는 점.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다른 이들에게 해가 되는 인간을 죽였을 뿐”이라는 미나의 입장은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와 같다. 갈등과 화해를 거치며 주인공들의 사랑이 커가는 동안 주검의 수도 늘어간다.

살인 행위의 해부가 아니라 하나씩 늘어나는 시체의 수습과 더불어 꼬여가는 내러티브의 압박이 초점인 <달콤, 살벌한 연인>의 구도는 <조용한 가족> <형사에겐 디저트가 없다> <프리즈 미>, 펜엑 라타나루앙의 <식스티 나인> 같은 영화와 비슷하다. 그러나 블랙코미디이건 스릴러이건 강간복수극이건 단일한 평면에 연쇄살인을 던져놓은 다른 영화와 달리 <달콤, 살벌한 연인>은 로맨틱코미디와 스릴러를 이어붙인 형상이다. 집안에 은닉된 시체를 관객이 장르 게임의 소도구로 가볍게 봐넘기지 못하고 석연치 않은 감정을 느낀다면 그 탓이다. 이는 현실과 비현실의 문제가 아니라 짜임이 다른 두개의 허구를 섞는 문제다. 예컨대 인물을 보자. 대우는 캐릭터가 스토리를 내장한 인물이다. 미숙하면서도 젠체하는 그의 성격은 줄곧 이야기와 감정을 생산한다. 반대로 미나는 스토리가 만들어낸 캐릭터에 가깝다. 그녀는 가끔 연애 실패의 핑계를 찾는 남자의 백일몽처럼 보인다. 어쨌든 이 영화가 지금까지 재능만큼 주목받지 못한 두 주연배우에게 선물이 되리라는 감독의 말은 틀리지 않다. 발랄하면서도 어딘가 무심한 최강희의 이미지는 미나 역에 적격이다. 하지만 인상적인 대사와 섬세한 연기의 기회는 박용우가 더 많이 누린다. 그의 연기는 <반칙왕>의 송강호를 상기시킨다.

손재곤 감독은 앨프리드 히치콕의 신도지만 그의 중편처럼 <달콤, 살벌한 연인>도 스릴보다 유머가 위력적이다. 그의 연출은 긴 호흡으로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서스펜스보다 짧은 호흡으로 예상을 격파하는 코미디와 개그에 능란하다. 살인을 둘러싼 <달콤, 살벌한 연인>의 유머는 주로 지엽적 사항을 문제 삼는 대사에서 온다. 사람들은 시체가 옷장을 차지한다거나 암매장 구덩이를 파는 태도가 진취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상대에게 투덜댄다. 한편 손재곤 감독은 빠른 장면과 느린 장면, 뜨거운 장면과 덤덤한 장면을 부딪쳐 재미를 격발시키고 관객의 반응을 쥐락펴락하는 요령에 능하다. 그는 스릴러라는 장르 자체가 아니라 스토리텔링의 묘(妙)에 매료된 듯하다.

영화 속에서 사랑에 성공한 줄만 아는 대우는 “과거는 상관없는 거죠?”라고 묻는 미나에게 흔쾌히 답한다. “괜찮아, 사람만 안 죽였으면 되지.” 우습고도 슬픈 순간이다. <달콤, 살벌한 연인>의 극단적 설정은, 상대의 진실성이나 관계의 성패에 대해 연인들이 품는 의심과 공포감의 은유인지도 모른다. 단조로운 촬영과 종종 겉도는 음악, 폭발력 약한 클라이맥스가 결함이지만 <달콤, 살벌한 연인>은 여러 단점이 결정적 장점을 해치지 못하는 영화다. 다음 농담은 뭘까 계속 귀기울이게 만드는 능력은 언제나 연애에서 유용하다. 상대가 관객이라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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