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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딱하게 보기] ‘다름’도 어떻게 보느냐의 ‘차이’, <크래쉬>

<크래쉬>

아카데미 작품상이 <브로크백 마운틴>이 아니라, <크래쉬>에 돌아간 것에 말들이 많다. 하지만 이상하다. 아카데미가 그렇게 공정한 상이었던가? ‘아카데미용 영화’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카데미는 자신의 구미에 맞는 영화에게만 상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적당한 감동과 거대한 스펙터클, 거기에 애국주의가 있으면 더 좋다. 모든 법칙에 예외가 있는 것처럼 아카데미에도 많은 일탈이 있었지만, 대체로 아카데미는 편식 경향이 심했다. 그런 역사를 생각해본다면 동성애를 정면으로 다룬 <브로크백 마운틴>보다는 사회적 이슈를 건드리면서도 용서와 구원으로 무난하게 결말을 맺는 <크래쉬>가 더욱 아카데미상에 적합하다.

논란이 있건 말건, <크래쉬>는 잘 만든 영화다. 풍성한 캐릭터와 인종간의 다사다난한 충돌은 설득력이 있고, 성찰할 거리도 있다. <크래쉬>에서 맷 딜런과 라이언 필립이 연기하는 LA 경찰의 캐릭터와 유색인종간에 가지고 있는 편견을 묘사하는 방식은 탁월하다. 스포일러라 밝힐 수 없지만, 마초적인 인종차별주의자와 선량한 시골 청년의 상반된 이미지를 가진 두 경찰이 어떻게 절대적인 상황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지를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인상적이다. <크래쉬>의 그들은 결코 완벽하지 않고, 그 누구도 초월적이지 않다. 선입견과 편견이 있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지배받으면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다.

다양한 인종이 샐러드처럼 뒤엉켜 살아가는 LA에서, 누구나 불만이 있다. 이라크인은 돌아가라, 는 낙서를 지우던 중동 여인이, 우리는 이란인이라며 눈물짓는다. 멕시칸이라고 부르자, 히스패닉 여인은 자신의 아버지가 푸에르토리코, 어머니는 엘살바도르라며 항의한다. 차를 훔치는 흑인은 모든 아시아인을 중국인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들은 한국인이거나 타이, 캄보디아인이다. 이란인과 이라크인은 다르고, 히스패닉이 모두 멕시칸은 아니고, 아시아에는 수많은 나라가 있다. 하지만 외부의 시선, 특히 백인들의 시선은 한결같다. 이라크나 이란이나 모두 중동이고, 엘살바도르나 브라질이나 모두 중남미고, 중국이나 한국이나 모두 아시아다. 그 내부의 수많은 차이와 다름을, 그들은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어쩌면 그게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일본과 전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백인이 보기에는 비슷한 점이 더 많다. 우리가 보기에 아일랜드계 미국인과 독일계 미국인이 거의 다를 게 없는 것처럼. 차이를 보고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점에 주목하여 같다고 여기는 것은 어쩌면 단지 시각이 다른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크래쉬>의 그들은, 다른 인종을 하나라고 생각하면서도 단지 피부색만으로 그들은 자신과 전혀 다르다고 여긴다. 결국 차별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시작된다. 결국 인종차별이 없어지는 건, 외계인이라도 등장해서 모든 사람들이 지구인의 동질감을 가져야만 가능한 것일까? 혹은 그래도 누군가는, 자신들이 외계인의 친인척이라 우월하다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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