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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더버그가 바라보는 미국의 현주소, <버블>

지난 1월 스티븐 소더버그의 신작 ‘HD영화’인 <버블>이 공개됐을 때 미국에서는 한바탕 논쟁이 있었다. 이는 작품에 대한 갑론을박이 아닌 이 작품의 공개 방식이 영화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극장 개봉과 함께 케이블TV 방송과 DVD 발매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버블>의 배급 방식은 한편으로는 기존의 영화산업 질서를 협박하는 위험천만한 일처럼 보이기도 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보편화된 디지털 문화에 적응할 수 있는 영화산업의 새로운 가능성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론 이런 개봉 방식에 대한 최종 평가는 소더버그 감독이 직접 제작에 참여하고 있는 ‘HD넷 필름스’가 계획하고 있는 6편의 작품들(<버블>은 그중 첫 번째 작품으로 나머지 작품들도 동일한 방식으로 공개될 예정이다)이 일궈낼 성과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디지털 문화의 일상화 속에서 영화산업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하는 시기에 서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듯하다.

<버블>은 그 독특한 공개 방식을 제외한다면 작품 자체로는 소더버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오래 기억될 작품은 아니다. 저예산 독립영화였던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1989)로 화려하게 등장한 이후 곧바로 예술적 침체기에 빠져들었던 소더버그가 새롭게 동력을 얻은 작품은 할리우드 장르영화인 <조지 클루니의 표적>(1998)이었다. 이후 소더버그는 <오션스 일레븐> 시리즈처럼 할리우드 장르와 스타 시스템에 기댄 작품들과 <영국인>(1999)과 <풀 프론탈>(2002) 같은 저예산의 실험적 작품들이 교차하는 독특한 필모그래피를 형성하고 있다. 후자의 작품군에 속하는 <버블>은 소더버그의 비주류적 감수성을 앞세우는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뒤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지만, 스타 감독의 저예산 독립영화라는 특이한 위치에서 한발 더 나아가는 성취를 일궈내지는 못했다.

<버블>은 언뜻 스릴러 장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장르의 공식에 무심한 작품이다. 미국 오하이오주의 작은 마을인 파커스버그의 ‘인형 공장’에서 일하는 마샤(데비 도버레이너)는 나이 든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중년 여성이다. 사람들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뚱뚱한 체형의 그녀는 직장 동료인 내성적인 청년 카일(더스틴 제임스 애슐리)에게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감정의 줄타기를 하고 있다. 그러던 중 공장에 미모의 미혼모인 로즈(미스티 돈 월킨스)가 새로 들어오고, 카일과 로즈가 서로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미묘한 분위기의 삼각관계가 형성된다. 로즈는 마샤에게 자신의 딸을 맡기고 카일과 데이트를 즐기지만, 다음날 아침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면서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든다.

이러한 기본적 스토리나 코미디에서 서스펜스 장르까지 다양한 영역을 소화할 수 있는 소더버그를 염두에 둔다면, 누가 범인인가 혹은 범행의 이유는 무엇인가 등등의 상투적 기대를 갖는 것은 당연하지만, 소더버그는 그러한 관객의 궁금증에 답하려 하지 않는다. <버블>에서 소더버그의 관심은 인물들의 표면적 삶에 대한 묘사와 이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 HD영화의 잠재력인 것처럼 보인다. 영화 속 인물들인 마샤, 카일, 로즈는 완전한 가족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족 내부나 그들 서로간의 관계에서 일상적 대화 이상의 감정적 교류를 나누지 못한다. 인물들이 가족으로, 친구로, 동료로 함께 한 공간에 머무를 때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는 이 영화의 핵심이다. 그들의 인간관계는 표면에서 표면으로 부유할 뿐이며, 소더버그는 이러한 그들의 표면화된 삶을 표면적 묘사를 통해 포착하려 한다.

무표정을 중심으로 감정의 변화가 새겨지지 않는 그들의 얼굴은 굳어버린 그들의 삶을 드러내는데, 이는 삭막하고 기괴한 소리로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공장에서 생산해낸 인형의 인위적 미소와 공명한다. 기계화된 인형의 웃음마저도 담아내지 못하는, 마치 각종 화학 용품으로 채색되기 이전의 고무 덩어리와 같은 인물들의 무표정(특히 마샤의 얼굴)과 그들이 놓여 있는 공간의 싸늘한 분위기는 소더버그가 바라보는 미국적 인간관계의 현주소이다. <버블>의 주무대인 파커스버그는 불안하면서 음산한 분위기를 전해주는데, 소더버그가 주로 롱숏을 통해 그러한 풍경 속의 사물화된 인물들을 정적으로 표현하는 데 주력하는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소더버그가 <버블>에서 다시 한번 촬영과 편집까지 도맡아하며 자신의 역량을 영화적 성과로 뽑아내고 있다 해도, 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아마추어로 구성된 연기자들(특히 마샤를 연기한 ‘데비 도버레이너’는 캐릭터가 배우에게서 스며나오는 느낌이다)의 호연과 음산한 인물들의 내면과 황량한 마을의 분위기를 배가해주는 어쿠스틱 기타의 영화음악이다. 미국의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버블>을 두고 저예산 독립영화가 생존하기 위한 돌파구를 이야기했지만, 이러한 평가가 한국 영화시장에도 적용 가능한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버블>은 한국에서도 개봉과 더불어 케이블TV와 DVD로 동시에 공개되는데, 한국 배급시장의 변화의 계기가 되거나 미국과 같은 논쟁을 일으키기에는 역부족인 듯하다. 지금의 극장 풍토를 감안한다면, 그러한 자극은 외국영화가 아닌 한국영화에 부여된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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