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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의 내면을 치밀하게 파고드는 ‘냉정’, <언러브드>

사랑은 벼락처럼 피할 수 없이 자아에게 닥치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인 결단이 필요한 선택이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성숙한 의미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위해 자아를 희생하는 것만큼이나 자아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숭고하고 애틋한 사랑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을, 심지어는 자신의 정체성마저도 기꺼이 포기하려고 할 때가 있다. 그런 사랑과 헤어지고 나면, 아름다운 추억은 간 곳 없고 상대의 마음을 잡으려고 애쓰다가 모든 것을 잃고 정신적으로 앙상해진, 낯선 자기 자신만 발견하게 될 뿐이다.

<언러브드>의 주인공 미츠코(모리구치 요코)는 시청 공무원으로 남들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의 평범한 일상을 잘 지켜내는 것, 즉 자신의 삶의 방식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승진 시험도 관심이 없고 부유하고 사치스러운 삶에 대한 동경도 없다. 어느 날 업무차 시청에 들른 사업가 가츠노(나카무라 도오루)의 눈에 미츠코가 들어온다. 그는 미츠코를 곁에 두고 싶어서 자기 회사로 스카우트 제의를 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직업에 만족한다면서 더 높은 연봉과 대우를 거절하고, 그의 관심만을 허락한다. 둘의 연애가 진행됨에 따라 미츠코는 가츠노와 자신이 얼마나 다른지 실감하고,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집과 옷을 초라하게 만드는 그를 자신의 삶에서 밀어내기로 마음먹는다.

미츠코가 가츠노가 선사한 명품 드레스와 고급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를 거절하고, 새롭게 선택한 것은 시모카와(마쓰오카 슌스케)의 300엔이었다. 편의점에서 계산을 하다가 300엔이 모자라 집에 가려던 미츠코는 아랫집에 사는 시모카와와 마주치고 그에게 300엔을 빌린다. 그 뒤 그녀는 자신이 진 빚보다 훨씬 더 많이, 사랑이 담긴 식사와 과일로 그것을 갚아나가기 시작한다. 그녀의 선택은 그녀 자신 이외에는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미츠코와 가츠노 모두 혼란스러워한다. 왜 그녀는 훨씬 더 부유하고 능력 있으며 그녀를 더 많이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가츠노를 버리고, 직업도 불안정하고 가난한데다가 그녀에게 애정을 보이지도 않았던 시모카와를 선택했을까.

미츠코의 대답은, 시모카와는 그녀와 ‘같은 세계’의 사람이며 그와 함께 있으면 자신의 것을 아무것도 버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녀에게는 안락한 삶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영화에서 ‘자신의 삶’이란 ‘변화없는 삶’과 동의어이다. 가츠노는 미츠코를 변화시키려고 애를 썼지만 그녀는 한치도 양보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에 싫증이 난 시모카와는 부유한 삶을 꿈꾸며 현재의 자신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미츠코는 ‘지금 그대로의 너(시모카와)’를 사랑하고 있다며 어떤 변화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엄청난 속도로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아무런 변화없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 미츠코의 태도는 너무나 단호해서 현실에 순응하는 패배자의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현실의 법칙을 거스르는 은둔자의 모습처럼 느껴진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영역에서 타인의 장력이 더 강해지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는 미츠코는 이전에 보았던 어떤 여성 캐릭터보다도 강한 자아를 갖고 있다. 그녀의 다소곳하고 가정적인 태도는 단지 그녀의 생활 습관일 뿐, 순종이나 희생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다. 미츠코와 같이 자신의 영역을 포기하지 못하는 여성은, 영화의 제목처럼 ‘언러브드’되기 쉽다. ‘사랑’이라는 권력장에서 남자들은 대부분 선택하는 이의 역할을 맡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는 더 사랑하는 여자를 택해야 하고, 여자는 자신을 더 사랑해주는 남자를 택해야 한다’라는 속설도 있지 않은가. 자신을 선택한 남자를 거부하고 자신이 선택한 남자에게서 만족을 찾는 미츠코 때문에 두 남자는 모두 스스로가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한 남자는 미츠코만 빼고 모든 것을 가졌기에, 다른 남자는 미츠코 말고는 가진 것이 없기에, 두 사람은 서로를 부러워하면서도 서로의 불행을 확인하고 약간의 위안을 삼는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기에 어떤 인간보다도 강해 보이는 미츠코는 남성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인물이다. 남자주인공들을 끊임없이 고민에 빠지게 하고, 자신의 것을 한치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그녀의 고집이 당황스럽고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잘난 남자의 삶에 무임승차하는 것을 거부하기에 성공이 여성을 얻는 방법이라는 일반적인 공식도 적용되지 않고, 남자의 무능력을 문제삼지 않지만 그의 성공을 함께 도모하는 데도 별 관심이 없다. 감독은 사랑과 선택 그리고 자아의 영역문제에 대한 끊임없이 문제제기하면서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잔잔하지만 강렬한 갈등 구조를 만들어내며, 사랑에 있어서 남녀간의 인식 차이라는 문제에 접근한다.

영화의 감독인 만다 구니토시는 아내와 함께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미츠코라는 인물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간다가와 음란전쟁> <도레미파 소녀 피가 끓는다> 등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던 만다 구니토시는 구로사와와 마찬가지로 장르영화에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며 독특한 영화 세계를 구축해낸다. 구로사와와 작업했던 두 영화는 외피는 로망 포르노라는 장르를 선택했으면서도, 철학적 요설과 난해한 상황 전개라는 기괴한 내면을 끊임없이 드러냄으로써 장르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전복시켰었다. 40살 넘는 나이에 <언러브드>를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영화를 완성한 만다는 남녀간의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순간적인 희열에 들뜬 ‘열정’보다는 인물의 내면을 치밀하게 파고드는 ‘냉정’을 선택함으로써 대중적 취향과 결별하고, 참을성있는 소수의 선택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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