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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하반기 신작 프로젝트 [2] - 시대역류
이영진 2006-06-23

시대극은 만만찮은 장르다. 영화를 만드는 동안 고증에서 재연까지 드는 수고는 물론이고 과거를 끌어와 현재와 어떤 접점을 만들 것인가 하는 고민도 적지 않다. 5·18 광주민중항쟁과 베트남 전쟁처럼 아직도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는 역사를 되짚어야 한다면, 그러한 부담은 배가 될 것이다. <화려한 휴가>와 <무기의 그늘>은 누구도 선뜻 택하지 않는 소재와 배경을 택했다는 점만으로도 주목받는 프로젝트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이제 막 돌리기 시작한 김지훈, 필감성 두 젊은 감독들로부터 고투의 과정 일부를 들었다.

정면으로 80년 광주를 바라본다, <화려한 휴가>

시놉시스/ 민우(김상경)는 택시기사다. 넉넉지 않은 생활이지만, 그는 공부 잘하는 동생 진우(이준기)만 바라보고 살고 있다. 직장 동료의 부추김으로 평소 호감을 갖고 있던 간호사 신애(이요원)와 극장 데이트를 하게 된 민우. 첫 데이트의 설렘은 그러나, 갑작스럽게 극장에 들이닥쳐 곤봉을 휘두르는 군인들의 등장으로 엉망이 된다. 난데없는 폭력은 평화로운 도시 광주를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만든다. 누구는 끌려갔다 하고, 누구는 죽었다고 하고. 신애 아버지이자 민우가 다니는 택시회사 사장인 흥수(안성기)는 과거 동료였던 게엄군 지휘관을 찾아가지만 상황을 파악할 수조차 없다. 한편, 진우는 학교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분노하고 시위대에 동참한다.

<화려한 휴가>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정면으로’ 다룬다. 게엄군의 폭력이 가해진 1980년 5월18일부터 시민군이 도청에서 최후를 맞는 5월27일까지, 10일 동안 고립되어 피흘리던 광주를 에두르지 않고 바라보는 시대극이다. 계엄군의 당시 작전명을 제목으로 따온 영화는 <꽃잎> <박하사탕> 등 피해자든 가해자든 개인의 내상을 통해 1980년 5월의 광주를 떠올리는 작품들과는 다른 궤적을 설정했다. <목포는 항구다>에 이어 두 번째 작품으로 <화려한 휴가>를 받아들인 김지훈 감독은 “대구 출신인데 고향 친구들이 매번 전라도 이야기만 하냐고 하더라. (웃음) 그동안 광주는 대학 가서 본 충격적인 영상물과 해마다 치러지는 기념식의 이미지가 전부였는데. 잘 모르기 때문에 연출 제의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기획시대 이수남 프로듀서로부터 김 감독이 <윤상원 평전>을 건네받은 때는 2004년 3월. 애초 시나리오에선 1980년 당시 들불야학 멤버로 광주항쟁을 대표하는 인물인 윤상원이 주인공이었다. “유족들이 영화화를 허락하면서도 광주항쟁을 특정 개인의 시점으로 바라봐선 안 된다고 우려하더라.” 시나리오 수정에 공을 들인 지 1년. 김 감독은 윤상원의 유족과는 다른 이유에서 어려움에 부딪쳤다. “윤상원은 지식인이었다. 어떤 상황에 대해 냉철하게 가치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를 내세웠을 때 관객의 마음을 흔들 수 있을까 싶었다.” 투사 윤상원은 그렇게 택시기사 민우로 바뀌었다. “처음엔 광주 곳곳을 둘러볼 수 있으려면 주인공 직업이 기동력있는 택시기사가 적당하지 않을까 반농담을 나눴다”는 김 감독은 “자료를 찾다가 경적 시위를 벌인 택시기사들을 담은 강렬한 사진을 봤고, 우리 주인공도 저기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고 말한다.

나현 시나리오 작가와 함께 주요 인물들의 캐릭터와 대사를 만드는 동안 가장 많이 참고한 책은 두터운 증언록. “또 상처를 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시나리오 모니터에 참석한 광주 시민들은 “무엇보다 많은 관객이 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신신당부했다고. “논문 쓰는 것도 아니고 계몽하려는 것도 아니다. 박제화된 그날을 환기하자는 제안 정도라고 본다”는 김 감독은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잿빛 역사를 뒤돌아본다고 해서 미리 편견을 갖지 말라고 한다. “내러티브는 통속적이라고 할 만큼 단순하다. 기교 같은 것도 부릴 생각 없다. 대신 그날의 진실을 충실히 보여줄 계획이다.” 실제 항쟁 10일을 들춰보면 온갖 드라마틱한 요소가 가득하다고 덧붙이는 이수남 프로듀서는 “엄혹한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인물이 있듯, <화려한 휴가> 또한 웃음 코드가 적지 않다”고 귀띔한다. 제작비 100억원을 들이고 안성기, 김상경, 이준기, 이요원, 박철민 등 충무로 주요 배우들을 불러들인 <화려한 휴가>는 6월26일 광주에서 4개월여 동안의 촬영을 시작할 예정이다.

1980년 5월의 광주는 어떻게 만들어지나

“근(近)시대극이 가장 어렵더라.” 광주 금남로를 둘러본 김지훈 감독은 세트밖에 답이 없다고 직감했다. 1980년 5월 광주의 중심 공간인 도청 앞은 현재 지하철 공사가 이뤄지고 있었고, 주변의 모든 건물들은 20여년 전과는 몰라보게 다르게 리모델링됐기 때문. 다른 소도시를 물색한다고 해도 별수없었다. “먼 과거라면 상상으로라도 채워넣을 텐데. 이번 영화는 저거 거짓이다라고 하면 드라마의 흐름이 깨질 테니 그렇게 할 수도 없고.” 한때 난관에 봉착했던 대형 세트 제작은 결국 광주시의 도움으로 해결됐다. 현재 광주시 북구에 만들어지고 있는 세트는 금남로 앞 거리 400m를 직접 만드는 대규모 공사. <공동경비구역 JSA> 세트의 스무배가 넘는 규모라고 한다. 김 감독은 “박일현 미술감독이 다른 영화 같으면 몇십 장면씩 찍을 공간인데 이번엔 잠깐 훑고 지나가는 정도라고 한숨을 쉬더라”고 어려움을 전한다.

전장을 부유하는 인간들의 치명적 사랑, <무기의 그늘>

시놉시스/ 포성이 끊이지 않는 1968년의 베트남. 야전에서 근무하던 한국군 해병대 상병 안영규는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후방도시 다낭의 합동수사대(CID)로 전출간다.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전장과 달리 평화로운 다낭. 영규는 야전에서 고생한 만큼 돈을 벌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암시장에서 달러를 긁어모으는데 골몰한다. 얼마 뒤 CID 지휘관 크라펜스키 대령이 피살되고, 사건 현장에서 안영규는 언젠가 길에서 만난 적 있는 매력적인 한국 여자 오혜정의 소지품을 발견한다. 베트남 경찰 팜꾸엔을 찾아가 사건의 유력 용의자를 넘겨주는 대가로 돈을 요구하는 영규. 이 일을 시작으로 세 남녀는 비밀 거래를 주고받게 되고, 결국 파국으로 걸어들어간다.

2003년 11월, <말죽거리 잔혹사> 연출부였던 필감성 감독은 차승재 싸이더스FNH 대표로부터 “<무기의 그늘> 본 적 있냐?”는 알쏭달쏭한 제안을 받았다. 평소 소설가 황석영의 팬이었던 그였지만, 그때까지 <무기의 그늘>만은 미처 챙겨 읽지 못했다. 한번 읽어보라는 차 대표의 권유에 그는 <무기의 그늘>을 뒤늦게 꺼내 들었지만, 필 감독은 아무래도 본인이 연출을 맡기엔 무리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소설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베트남 암시장을 배경으로 한 탐정소설 같은 이야기가 한축이고, 이념 때문에 서로 등을 돌린 팜꾸엔과 팜민이라는 베트남 형제 이야기가 또 한축이다. 후자는 아무래도 자신없었다.” 겪지 못한 역사적 상황에 대해 가치 판단을 내리기란 쉽지 않은 일. 그걸 또 요즘 젊은 관객에게 설득력있게 제시한다는 건 더더욱 버거운 일이었다.

두 차례나 포기 의사를 밝혔다는 필 감독이 결국 <무기의 그늘>을 다잡고 2년을 꼬박 올인한 이유는 뭘까. “소설을 처음 대했을 때 고전 할리우드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타락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순수를 되찾겠다고 분투하는 인물들에선 캐럴 리드의 <제3의 사나이>가 떠올랐고, 평소 즐겨보던 필름 누아르의 느낌을 영화에 담아보고 싶었다.” 현재 7고까지 진행된 <무기의 그늘>은 필 감독의 설명에 따르면, “부초 같은 인간들이 전쟁이라는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치명적인 음모가 뇌관처럼 박힌 사랑에 빠져드는” 이야기로 변형됐다. 소설에서 팜꾸엔의 여자로 나오는 캐릭터의 분량을 키워 주인공인 안영규와 삼각관계를 만들었다고. “시대 상황을 전면적으로 다룰 경우 대개 인물들의 정서가 매몰되는 것 같다. 내 경우엔 인물들의 황폐한 정서에 최대한 깊숙이 들어갈 거다. 그렇게 하면 시대 상황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 같다.”

타이에서 모든 촬영이 진행될 <무기의 그늘>은 범아시아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팜꾸엔 역은 홍콩 유명 스타가 맡게 되고, 메인 스탭을 제외한 제작진은 타이 인력들이 맡는다고. “베트남을 몇 차례 다녀왔는데 일단 촬영을 위해선 시나리오 허가를 받아야 하고, 또 다낭의 경우 개발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라 촬영이 용의하지 않다”는 게 필 감독의 설명. 건기를 놓치면 또 1년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라 <무기의 그늘> 제작진은 현재 헌팅과 시나리오 수정 등을 병행하며 올해 연말 촬영 시작을 목표로 바삐 뛰고 있다. “스탭들의 숙련도는 높지만, 아무래도 언어가 다르다보니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을 것 같다. <무사> 때 연출부 경험이 있어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미리 예상할 수 있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다.”

1968년의 베트남 다낭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영화 속 주요 공간인 후방도시 다낭은 <블레이드 러너>의 2019년 LA처럼 묘사될 계획이다. 자신을 감독의 길로 이끈 <블레이드 러너>를 어떻게든 데뷔작에 집어넣고자 하는 필 감독의 무모한 욕심 때문은 아니다. “다낭은 모든 것이 혼재된 디스토피아다. 베트남 토착문화가 있고,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잔재가 있다. 또 미군을 통해 들어온 문화가 있고, 꿈과 기회를 찾아 모여든 각국의 아시아 사람들이 있다. 다낭은 그런 곳이다.” <스파이 게임>의 거친 질감, <비포 나잇 폴스>의 강렬한 원색, 레드와 블랙과 엘로로 흥청하는 분위기가 물씬 묻어나는 알렉스 웹의 사진까지 필 감독의 작업실은 다낭을 꾸밀 참조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시대 재연 및 창조에 능한 <태극기 휘날리며>의 신보경 미술감독이 일찌감치 가세해 필 감독의 상상을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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